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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r 25. 2018

안녕 나를 소개하지 이름 김하온 직업은 traveler

사람이 무언가를 즐기는 데에는 참 다양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간 불순한 이유로 엠넷을 즐겨 봤다. 엠넷은 물오른 악마의 편집으로 한창 래퍼들 인성 분리수거 했던 이력이 있다. 당시에 악질적인 의도를 알면서도 얘도 병신 쟤도 병신 낄낄 병신 옆에 병신 낄끼ㄹ 하며 즐겁게 봤었다. 후에 욕을 사발로 처먹은 엠넷이 악마와 손절하고 병신력이 점점 떨어져 갈 때쯤 고등래퍼가 나왔다. 어린 놈들이 내가 왕이고 이 판 다 찢어 놓고 얼쑤 절쑤 하는 난장일 것 같아서 안 봤다.
 
어느 하릴없는 주말,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아이피티비와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는데 고등래퍼2가 나왔다. 학년 별 사이퍼 중이었는데 스핀스왈로펌에 꿀벌 옷 입은 남자애가 너무 귀엽더라.
“안녕하세요. 저는 진리를 찾아 떠나 얻은 것을 바탕으로 저만의 예술을 하고픈 여행가 만 18세 김하온입니다”
스스로를 텅 비우기 위해 명상을 하고 어쩌고. 오구 그런 걸 다 주워들었어 우쭈쭈. 명상가는 싸이퍼 직전까지 머리를 긁적이는 귀여움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랩을 시작하는데...

두 개의 심장을 가졌을 것 같다

 "안녕 나를 소개하지 이름 김하온 직업은 traveler
취미는 tai chi, meditation, 독서, 영화시청
랩 해 터 털어 너 그리고 날 위해
증오는 빼는 편이야 가사에서 질리는 맛이기에
나는 텅 비어 있고 prolly 셋 정도의 guest
진리를 묻는다면 시간이 필요해 let me guess
아니면 너의 것을 말해줘 내가 배울 수 있게
난 추악함에서 오히려 더 배우는 편이야 man

거울 보는 듯한 삶 mirror on the wall
관찰하는 셈이지 이 모든 걸 wu wut?
뻐 뻔한 걸 뻔하지 않게 switch up
뻔하지 않은 게 뻔하게 되고 있으니까 ya know
 I ain't trynna be something
 I just trynna be me
그대들은 verse 채우기 위해서 화나 있지
물결 거스르지 않고 즐겨 transurfing
원한다면 내 손으로 들어올 테니 um

생이란 이 얼마나 허무하고 아름다운가
왜 우린 우리 자체로 행복할 수 없는가
우린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중인가
원해 이 모든 걸 하나로 아울러주는 답
배우며 살아 비록 학교 뛰쳐나왔어도
깨어있기를 반복해도 머리 위로 흔들리는 pendulum
난 커다란 여정의 시작 앞에 서 있어
따라와 줘 원한다면 나 외로운 건 싫어서"

(친절한 url: http://tv.naver.com/v/2765359)


 랩을 시작하기 전에 뜯고 있던 엄지손톱을 랩이 끝날 때까지 입에 넣고 있었다. 그때의 감정을 놀랐다고 표현하기엔 좀 더 참혹하고 감동적인 단어를 써야 할 것 같다. 내가 갖고 있던 꽤 견고한 생각의 축 하나가 부서졌으니까.
 
가사에 ‘transurfing’과 ‘pendulum’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과학자 바딤 젤란드가 쓴 <리얼리티 트랜서핑(reality transurfing)>에 나온 트랜서핑 이론에 여론이 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과 관련해 펜듈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걸 가사에 썼다. 온전한 자기자신으로 깨어있고자 하지만 다수의 선택에 영향을 받다는 뜻인 것 같다. 열여덟 살이 쓴 가사가 그랬다. 그 가사는 어디서 왔는지, 가사를 쓴 정체성은 어디서 왔는지 감도 안 왔다. 물고 있던 엄지를 내려놓았다.
 
내 고등학생 때를 떠올려보면 점심 시간이 기억난다. 밥을 반은 국에 말고 반은 아무 반찬이나 믹스매치로 슥삭 비벼서 왼손으로 떠먹었다. 칫솔질도 왼손으로 하느라 침이 자주 점성 있게 늘어졌다. 남은 오른손으론 수학문제를 풀었다. 근거 없이 구원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공부는 종교였고 나는 열성적인 신도였다. 하지만 감내해야 할 희생이 많아 수학의정석이 방정식에서 함수로 넘어갈 때 즈음 믿음을 지키는데 버거움을 느꼈다. 이때 많은 신도들이 그렇듯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믿어야 할 이유나 구원의 실재, 또 다른 믿음에 대한 가능성.
 
나는 답도 없이 의문스럽기만 한 상태가 정말 별로였다. 동아줄을 잡긴 잡아야 하는데 어떤 게 튼실한 건진 모르겠고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쫓아올 것 같아 똥줄이 존나게 타는 상태. 마음으로 치자면 흔들다리에서 하염없이 흔들흔들하는 심정. 기약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다수의 사람이 선택했고 믿음직한 지인들이 홈쇼핑 할인 상품처럼 강력 추천하는 동아줄을 잡았다. 같은 줄을 잡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뒤져도 혼자 뒤지진 않겠구나. 그게 눈물 나게 안심스러웠다.
 
내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주로 썼던 방식이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오래 서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건 좀 아닌데 싶으면서도 불안을 빨리 떨치고 싶어 다수의 선택에 편승한다. 그 뒤엔 선택에 대한 꾸준하고 성실한 합리화.
 
김하온에겐 불안을 견디며 선택을 보류하는 힘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불안이 싫다고 아무거나 이게 답이다!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고민했을 다. 뭐가 맞는 길일까, 저들을 따라가면 될까, 그런데 왜 불안할까, 왜 평화를 찾을 수 없을까. 던진 질문에 대해 공부하고 답을 내려보고 내린 답을 부정하고 다시 공부하는 과정 속에 스스로 납득이 가는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를 기쁘게 했던 것들보다 그를 우울하게 하고 여러 날 고민하게 했던 것들이 그의 정체성에 더 크게 관여했을 것이다. 기쁨은 심플해서 주로 그냥 기쁨이고 말지만 고민은 나의 존재 이유와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삼라만상들이 그의 정체성이 되고 가사로 쓰였다.
 
그의 자기소개를 다시 떠올려본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리를 찾아 떠나 얻은 것을 바탕으로 저만의 예술을 하고픈 여행가 만 18세 김하온입니다” 이제 보니 그는 스스로를 가장 정확하게 소개할 줄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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