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향기가 날 것처럼 희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작고 반듯한 삼각형 말이다. 대체 저 끄트머리가 왜 살짝 접혀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난 원래 책을 잘 접고 잘 구기고 잘 더럽힌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냐, 빈 페이지가 접혀 있는 게 문제다. 인상 깊은 구절도 없으면서, 들춰 볼 내용도 없으면서 왜 접어놨냐, 이 말이다. 한참 동안 빈 페이지와 삼각형을 들여다 봤다. 창으로 빛이 들었다. 빛은 창문 언저리에서 나뭇잎을 만나 잎 모양의 그림자를 페이지 위에 떨어뜨렸다.
‘아. 생각났다.’
그래 생각났다. 지하철이었다. 오전이었고.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빈 페이지가 나왔다. 지하철이 닉값도 못하고 지상으로 풀쩍 뛰어 나온 참이었다. 지상의 빛들이 이때다 하고 창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등 뒤로 쏟아진 흰 빛이 빈 페이지를 채웠다. 원래도 흰 종이에 흰 빛이 비추어 희어도 너무 희었다. 흰 향기가 날 것처럼 희었다.
‘집에 가져가고 싶다.’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랬다. 햇빛을 갈피처럼 끼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아쉬워서 종이라도 접어 두었다.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굳이 뭐라도 해보는.
빛이 거두어졌다. 페이지를 넘겼다.
흰 빛 같은 이들이 떠올랐다. 아름다웠지만 더 이상 곁에 없는 사람들. 아니 곁에 없어서 아름다운 사람들. 아니 곁에 없지만 아름다웠던 사람들. 아니, 아니.
아무튼.
그들과 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접어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나. 시간은 종잇장이 아니라 접을 수도 없어 언제까지나 현재 페이지로 남겨두려 했던 지난한 노력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럴 수록. 넘어가지 않는 책장처럼, 고인 물처럼 시간과 관계는 지루해지고 부패했다. 넘길 것은 넘기고 흐를 것은 흘러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흰 빛처럼 그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글쎄.
잎 그림자가 빈 페이지 위에서 춤을 추었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 정반대의 것이 오기도 하는구나. 이 또한 아름다웠다. 곧, 그림자는 수월히 증발하여 빈 페이지는 정말로 비어버렸다. 공허하지만 이 또한 역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