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깔짝깔짝

과거 있는 사람이군요

초를 세는 습관

by 빵떡씨

1초, 2초, 3초, 4…

초를 세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은 3초 반. 짧았다. 셈해본 결과 평균 5초 정도 된다. 가끔 8초를 주파할 때가 있는데, 그 즈음이면 난 거의 울 지경이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러니까 그가 카페 빈 자리나, 합정역 2번 출구 앞이나, 지하철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의 신발끈이나, 쓰레기통 옆이나, 딱히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어딘가를 오래도록 쳐다보는 시간 말이다. 그 시간을 나도 모르게 세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 그 시간은 내가 그의 얼굴을 마음 놓고 뜯어보는 시간이었다. 내 눈은 항해사요, 그대 얼굴은 짙푸른 바다니 마음껏 탐험해 주겠노라. 그의 얼굴 옆 선과 턱 선과 그 턱에 있는 점과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속눈썹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보곤 했다. 집요하고 공허하게 어딘가를 바라보는 습관은 그는 수많은 매력 중 하나였다. 그의 입술이 그조차도 모르게 살금살금 움직여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진.


아닐 수도 있었다. 내 기분 탓, 혹은 그가 그저 입맛을 다신 것,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주인공 이름을 부른 것, 입술을 우- 내밀어 잠시 귀여운 짓을 해본 것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니 그가 정말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는지도 확실치 않아졌다. 내가 어떤 착각을 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수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초를 세고 있었다.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초의 길이와 내 우울의 수심은 비례했다. 무슨 생각했어 같은 깜찍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유니콘이나 뭐 그런 세상에 없는 동물을 생각했다고 치기로 했다. 나를 위해 그러기로 했다. 그가 생각의 바다, 아님 생각의 구렁텅이, 생각의 늪지대 그것도 아니면 생각의 사각지대에 빠져 있던-아무튼 절대 누군가와 함께 보낸 과거에 빠진 건 아닌-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 세계에 돌아왔음을 축하하는 의미로 그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내 어딘가를 째서 입꼬리를 만든 듯한 미소였다. 아프지만 뭐 어쩌겠나.


어느 유명한 작가는 삶이 악보와 비슷하다고 했다. 삶은 누군가를 만나 빈 악보에 음표를 그려가는 일이라고. 아 오글거려. 아무튼 그와 내가 만났을 때 우린 빈 악보는 아니었다. 이미 누군가와 어느 정도 선율을 만들어 놓은 악보였다. 서운할 건 없었다. 곡이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그가 가끔 생각에 잠기는 것도 악보에 쓰인 곡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감상하는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를 사랑하기 위해 악보에 쓰인 계이름을 하나 하나 읊어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야 다음 오선지에 괜찮은 음표를 그릴 수 있을 테니까. 슬프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슬펐다.


어쩌면 평균 5초 정도 되는 그 시간까지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쩌면 시간 여행을 마친 그에게 진심으로 환히 웃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쩔 도리는 없다.

그를 사랑한다. 뭐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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