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깔짝깔짝

세상이 색을 바꿀 때

너도, 너의 그림자도 없는 풍경

by 빵떡씨

지붕에 고인 물이 쏟아지듯. 헤어지자는 말이 툭 쏟아졌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모든 순간보다 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는 너에게 줄 남겨진 말이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웃음이 많아졌던 것처럼 이유 모를 울음이 몸 속에 차 올랐다. 광대 근처까지 넘실넘실. 넌 울음 대신 웃음이 차 올랐는지 코웃음을 쳤다.
“하-.”

서로에게서 서로를 떼어내니 삐죽한 철근이 튀어나왔다. 여위고 파르스름해 얼른 다시 껴안아야 할 것 같았지만 그대로 버티고 서서 서로의 삐죽함을 바라봤다. 얼마나 날카로웠나. 나를 얼마나 찔렀나. 오래된 연인이었기에 난 자리가 컸다. 심장 근처까지 아슬아슬하게 구멍이 났다. 너와 난 서로 마주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제 몸에 있는 구멍만 눈에 들어왔다.


봄이 평등하게 내려앉아 세상은 있는 그대로보다 조금 더 행복해 보였다. 내가 참았더라면 너와 나의 어깨 위에도 명암을 드리웠을 볕을 생각했다. 따듯하고 반짝반짝 했을 텐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너에게서 봄을 빼앗은 벌로 나는 발끝만 쳐다봤다. 이까짓 게 벌이라면 달게 받으리라.

“네가 밉지는 않아”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너는 이별 후에 생선을 굽던 조제처럼 담담했다. 뭔가를 굽진 않았지만 몸 속에서 무언가를 삭이고 있었다. 너는 일어나 볕으로 걸어갔다. 그때야 우리가 앉아있던 곳이 그늘인 줄 알았다. 너는 천천히 오래오래 걸어갔다. 늦은 오후라 걸어가는 너의 그림자가 길었다. 너는 작아졌고 시간은 영 흐르질 않았다.


너도, 너의 그림자도 없는 풍경이 내 목덜미를 콱 물었다. 나는 소리 내지 못하고 고개 숙여 울었다. 형을 채우지 못해 계속 발끝만 보면서. 지나가는 어떤 이가 보기에 ‘깊이 생각하는 자구나’싶게 푹 숙이고 울었다.

기형도를 생각했다. 사강을 생각했다. 이상을 생각했다. 니나를 생각했다. 세상의 비극적인 사랑들을 생각했다. 그 앞에 코 흘리는 어린 아이 같은 나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코 흘리는 아이가 제일 슬퍼 보였다. 모네의 <수련>처럼 세상은 색을 바꿨다. 나는 일어났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옆 사람과 비슷해 보이려 애쓰며 뒤뚱뒤뚱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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