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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Dec 16. 2018

첫사랑

성석제 <첫사랑>을 읽고

명문역 뒷산엔 표지판이 꽂혀 있다. '복숭아 판매'가 피 칠처럼 적혀있다. 역과 뒷산의 거리가 꽤 되는데도 그 글씨만은 역에서도 훤히 보인다. 다 익은 복숭아들은 노란 봉투를 뒤집어 썼다. 그 이상 빛을 쬐면 오히려 해가 된다. 옆으론 비닐하우스들이 잘 빗질 된 백발처럼 늘어서 있다. 내가 중학생일 때부터 복숭아 산을 밀고 상가 단지를 만들겠다는 말이 휑휑히 돌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숭아 산은 건재하다. 산 주인 성격이 보통이 아니지 싶었다. 

오랜만에 복숭아 산에 올랐다. 비 온 직후라 땅이 질었다. 발 아래 트럭 바퀴 자국이 선명했다. 진 곳을 피해 길 가생이를 따라 걸어도 진흙이 들러 붙었다. 진흙 말고도 많은 것들이 질척거리는 동네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명문도로 이사를 왔다. 열 살의 눈에도 이곳은 오래 살아 마땅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어나는 일들은 주로 내 마땅함과는 별 관련이 없었고 나는 명문도에서 10년을 살았다. 지금도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이곳의 냄새가 난다. 씻기지 않는 체취처럼 기억에 들러붙어 있다. 

겨드랑이에 털이 나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싫어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이 동네를 증오했다. 다음으로 부모를 증오하고 다음으로 스스로를 증오했다. 그 과정은 2차 성징처럼 자연스럽고 두렵게 진행됐다.

명문도는 원래 섬이었다. 후에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이어지게 됐다. 지금은 섬도 육지도 이도 저도 아니다. 초등학생 땐 아빠와 버스를 타고 종종 바닷가에 갔다. 바다는 바다인데 떳떳하게 바다라고 부르긴 조금 머쓱한 그런 바다였다. 등대나 밀물, 썰물, 방파제 같은 것들을 대강 모아 놓고 바다인 척하는 바다. 무한히 많은 무한리필 조개구이 집과 횟집을 짓기 위해 갖춰 놓은 구색 같은 바다. 

서울서 가까워 주말이면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있었다. 대부분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주말 나들이를 망치긴 싫어 '그래도 바다긴 바다'라는 말로 성에 안 차는 바다 풍경을 무마했다. 그저 조금 실망스런 주말을 보내면 그만인 그들이 부러웠다. 치미는 배멀미처럼 몰려와 사진 몇 장 찍고 게워내지듯 떠나는 뒤통수의 행렬. 그 행렬을 따라 명문도를 떠나지 못하고 주말과 평일, 그 다음 주말과 평일, 또 그 다음 주말과 평일을 내내 실망스러워야 했던 일상이 싫었다.

명문도의 풍경은 밤을 꼴딱 샌 사람의 낯빛처럼 칙칙했다. 회색 바다, 쓰레기더미처럼 모여 있는 조개구이 집, 조개구이 집 사이사이 '베스트 모텔' '꿈의 궁전' '가요 왕국' 간판, 수상한 냄새들. 

그리고 그 모든 싫은 잔상 속에 네가 있었다. 풍경과 어울리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따로인 네가.

너와 난 가끔 바닷가에 왔다. 처음 명문도에 왔을 때만 해도 명문도의 바다는 사람 기척이 적은 곳이었다. 하지만 명문도 사람들은 노는 땅을 그냥 두면 두드러기가 돋는 병이 있었다. 어느 여름 날, 명문도의 바닷물이 달에게 끌려가 갯벌이 모습을 보인 날. 잘 익은 빵처럼 부풀어오른 뻘을 본 명문도의 이장은 두드러기를 피가 나도록 긁으며 외쳤다. 뻘에 체험학습장을 지어라! 조개구이 집을 더 지어라! 등대엔 라카로 그림을 그려라! 마스코트도 만들어라! 포장마차를 줄줄이 세워라! 남산처럼 자물쇠를 걸어라! 이장은 명문도의 관광지화를 나폴레옹처럼 진두지휘했다. 말에서 떨어지는 나폴레옹처럼 뻘에 처박히면 좋겠다 싶었다.

너와 난 이따금 방파제에 앉아 갯강구들이 발 맞춰 포크댄스를 추는 걸 바라봤다. 그 짓을 얼마간 말 없이 보고 있으면 깡통열차가 툴퉁툴퉁 다가왔다. 깡통열차의 기관사는 항상 삶은 달걀처럼 무표정했다. 깡통열차엔 항상 한 여자애와 아주머니가 타고 있었다. 여자애는 언제나 모자를 눌러 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아주머니는 여자애와는 반대로 고개를 바짝 들고 있었다. "아~ 재밌다아~ 너허무 재밌어요~~ 타보세요~"를 연발하며 이를 보이고 웃었다. 깡통열차 가족은 까만 뒤통수를 보이며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Cass라고 쓰인 아주머니의 파란 앞치마가 바람에 투덜투덜 날렸다.

방파제 주변으론 노점상이 많았다. 메이드 인 차이나 장난감을 파는 상인이 싸이키 불빛을 뿜는 팽이 몇 개를 바닥에 돌렸다. 팽이는 클론의 <초련> 부르며 신명나게 돌았다. 노래가 참 구식이다 하는 얘기를 했다. 그 때로부터 십 년이 지나 며칠 전에 지하철에서 그 팽이를 조우했다. 여전히 초련이 나오고 있었다. 빰-빰 빰-빰빰빰. 8비트의 초련은 기억에서 바다 바람을 불러 왔다. 비리고 불안한 냄새. 팽이 위에서 너는 춤을 췄다. 아주 작아진 너는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들고 팔을 휘둘렀다. 성실히 돌던 팽이가 초췌하게 쓰러졌고 냄새도 사라졌다. 너도 없었다.

자물쇠가 슨 녹이 걸린 난간을 지나 빨간 등대에 도착했다. 라카로 써진 '명문도' 아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나는 네 옆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등대 1층엔 특산품점이 있었다. 특산품점 입구엔 명문도의 마스코트인 '통일 코끼리 통통이' 인형이 있었다. 명문도가 통일과 코끼리 중 어느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귀엽다고 했다. 통통이는 머리에 먼지를 얹고, 우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너는 이 모든 게 좋다고 했다. 동네 부흥을 위해 이것저것 하는데 하는 것마다 잘 안 되는 게 자기 인생 같다고 했다.  깡통 열차가 다시 우리 앞을 지나갔다. 이번엔 한 커플이 더 탄 채였다. 너는 커플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린 소라를 한 컵 사 먹었다. 너는 소라가 아주 똑똑한 음식이라고 했다. 소라 껍질 속에서 이쑤시개로 살을 빼낼 때 정신을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고. 사람들의 집중을 받는 법을 잘 아는 음식이라고 했다. 나는 꽤 옳다고 주억거렸지만 그땐 네가 하는 말이면 거진 맞다고 생각했다.

소라를 다 비웠을 즘에 우린 명문역에 도착해 있었다. 복숭아 산으로 갔다. 산에서 고양이를 만났는데 마치 우리더러 따라오라는 것처럼 뛰다가 멈춰 돌아보고 또 뛰다 멈춰 돌아봤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간 이유가 이런 걸까.

산 중턱엔 파란 비닐을 겹겹이 덮어 놓은 터가 있었다. 우린 별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기독교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별장 주변으로 에프킬라를 한참 뿌렸다. 성호까지 긋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후드 집업을 벗어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너와 난 나란히 앉아서 서로 새끼 손가락을 포개며 놀았다. 한 사람이 자기 새끼 손가락을 다른 사람의 새끼 손가락 위에 올려 놓으면 밑에 손가락이 깔린 사람이 자기 손가락을 빼내 그 위에 얹고 또 얹고 얹고 하며 반복하는 놀이였다. 그러다 누구 한 사람이 손가락을 꽉 걸고 놓아주지 않으면 끝나는 식이었다.

기억나는 일이란 이런 것들 뿐이다. 이런 기억들은 머리 속에서 갈매기처럼 날개를 펴고 곰처럼 몸집을 부풀려 달팽이처럼 끈적하게 늘어 붙는다. 기억 속의 너는 나를 명문도로 데려간다. 명문도에서 너는 소라를 빼 먹고 너는 쪼그려 앉아 눈 위에 이름을 쓰고 너는 담배를 피다 나를 쳐다보며 웃고 너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너는 새로 산 옷을 자랑하고 너는 나를 지나쳐 걸어가고 너는.

- 성석제 <첫사랑>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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