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들 어른이 된다
날짜: 2018년 12월 23일 일요일 | 날씨: 메리 휴일 크리스마스
- 어떠세요...? 이사님?
- 모.. 나쁘지 않네요
- ㅎ... 다행이네요
우리 팀 회의 시간에 자주 들리는 대화다. 여기서 이사님은 나다. 사원인데 마치 이사처럼 팀장과 대리 아이디어를 컨펌한다고 붙여준 별명이다. 팀장님 말씀하시는데 이건 괜찮네요 그건 좀 아니네요 싸가지 없이 대꾸하는 어린놈...이라고 할 수 없으니 해학과 풍자의 기법으로 "어이구 빵떡씨가 우리 팀 이사님이지"라고 하시는 거다. 참 온건하신 분이다.
이 일기를 처음 쓸 때만 해도 노른자 뚝뚝 떨어지는 햇병아리 신입이어서 저런 짓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는 팀장님 담배 피실 때 연기님 지나가시라고 길도 터드리고, 팀장님 낮잠 안 깨시게 꿀꽈배기도 녹여먹고, 팀장님 말씀하시면 식물들 광합성 하는 소리도 못 나게 하고 그랬었다. 그런 시절이 지나 이제 어엿한 2년 차가 되어 소위 짬이 좀 찬 사원이 되었다.
어느 날 점심 다 처먹고서도 회사에 들어가기 싫어 밑반찬으로 나온 맛살을 한 올 한 올 찢고 있었다.
- 빵떡씨 한 시 넘었어요. 들어가죠?
- 아아... 십 분만.. 아니 오 분만 더 있다 가요
- 이야 빵떡씨 이제 신입 아니라고 여유가 좀 있네?
그 말을 듣는데 문득 '신입 사원과 그냥 사원의 기준은 무엇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 작년만 해도 신입사원이었는데 지금은 누가봐도 신입의 행색은 아니다. 대체 나는 언제 신입이 아니게 되었을까. 나는 이 글을 읽고 스스로가 신입사원인지 그냥 사원인지 쓸 데 없이 궁금해졌을 전국의(?) 사원들을 위해 자가진단을 준비해 보았다.
1. 상사가 일을 시켰을 때
'이걸 내가 어떻게 하지?' 라면 신입사원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 라면 그냥 사원
신입 땐 일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실 신입에게 일을 시키면 일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배가 된다. 일 알려줘야 되지 물어보면 답 해줘야 되지 다 끝내면 검토해야 되지.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라는 생각에 신입을 앉혀만 두는 선임들이 간혹 있다. 그래서 난 지렁이보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 더 있을 뿐인 내게 일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웠었다. 이 일을 잘 해내서 상사들에게 꼭 인정 받겠다는 참혹히도 신입다운 열의가 있을 때였다.
지금은 일을 받으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이 일을 내가 왜...'. 사실 2년차가 되면 누가 일을 시킨다기 보다 그냥 내 일이 존재한다. 어디서 비롯되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몫의 일이 '있다'. 거기에 누가 일을 얹기까지 하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가'를 조목조목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대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닌지, 내일 해도 될 일은 아닌지, 아예 하지 않는다면 사무실이 무너지고 팀장이 인턴 되는 중차대한 일인지 면밀히 따져본 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일 때 '시ㅂ..'하는 욕 같은 한숨, 줄여서 욕숨을 나직이 뱉고 일에 착수한다.
2. 미팅에서
쫄린다면 신입사원
졸리다면 그냥 사원
신입 때나 지금이나 미팅은 쑤ㅖㅅ이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 싫은 핀트가 약간 다르다. 신입 땐 미팅이 너무 쫄렸다. 내가 실수해서 이 중요한 미팅이 어그러지면 어떡하지.. 내가 이상한 아이디어를 내서.. 대답을 못해서....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 자의식 과잉이고, 실상은 그저 맨 끄트머리 의자에 앉아서 흰 종이는 얼마나 희며 까만 글씨는 또 얼마나 까만지 바라만 보다 올 때가 대부분이다. 차 키에 달린 키링처럼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옵션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졸리다. 가장 악명 높은 미팅은 점심 시간 직후 미팅이다. 초, 중, 고 세 모교의 교장선생님을 전부 뫼셔 놓고 자장가 삼중주를 시켜도 이보다 졸리지는 않을 거다. 사무실에 있을 때처럼 잠을 깨기 위해 미스트를 뿌리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액션을 취할 수도 없고, 그저 목석 같이 앉아서 하나님 제발 잠 좀 깨게 해주세요 비는 수밖에 없는데, 속으로 빌다가 또 졸기 때문에 기도는 항상 하늘에 닿기 전에 떨어진다.
명함이라도 안 챙겨 오면 아뿔싸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지는 미팅을 거듭하다 보면, 살짝 졸다 팀장님이랑 눈 마주쳐도 미소로 화답할 줄 아는 젠틀한 2년차 사원이 된다.
3. 혼날 때
울음을 참기 힘들다면 신입사원
울분을 참기 힘들다면 그냥 사원
팀장님 책상의 담배갑을 봤다가 눈알을 굴려 아로나민 골드 박스를 봤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팀장님 머리 위 달력을 봤다가 다시 담배갑에서 아로나민 골드, 달력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트라이앵글. 내가 혼날 때 눈물을 참는 방법이었다. 혼내는 걸 그대로 듣고 있다간 별님 반 어린이처럼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당한 이유로 혼이 나거나 지나치게 욕을 처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상사가 나를 불러다 세워 놓고 약간 낮은 음정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몹시 서러웠다. 쓸모 없는 나.. 이것도 제대로 못 하는 나... 오늘은 밥값도 못 했다는 생각에 자아는 오열 육열 웬열이었다.
지금도 혼은 난다. 하지만 그 양상이 선생이 학생을 질책하는 느낌보다는 오래 된 부부가 어제 싸웠던 이유로 오늘도 싸우면서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아이구 내 팔자야 하는 느낌에 가깝다.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화해하는 지긋지긋한 감정소모의 반복. 이제는 전처럼 잔소리를 고분고분 듣고 있질 못 한다. 귀는 혼나고 있는데 뇌에선 '이게 진짜 내 잘못인가'를 주제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다. '실수를 한 건 팩트다' '일을 시발 소 여물 주듯 왕창 줘 놓고 제대로 되길 바라냐' '일 많다고 다 실수하나' '팀장님도 실수하지 않나' '너는 남 잘못만 잘 기억하더라' '나는 잘못이 없으니까! 회사를 위해 소처럼 일한 잘못 밖에 없다!!' 두 자아가 거의 머리채를 잡을 지경이 돼 정신을 차려보면 충혈된 눈으로 팀장님 쪽 파티션을 노려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짬이 차면 짬에 맞는 책임감과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허투루 연차 쌓는 요령만 늘었다. 짬이 차도 월급은 차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 본다. 그렇게 다들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