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9년 1월 1일 화요일 | 날씨: 아등바등 잘 살아 봅시다
나는 뭔가가 하기 싫으면 그 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적인 습관이 있다.
'운동이란 무엇인가'
'운동이 인간 삶에 왜 필요한가'
'인간은 운동 없이 살 수 없는가'
'애초에 신께서 적당한 근육량과 슬림한 바디라인을 주셨다면 인간의 삶은 훨씬 윤택하지 않았을까'
'조물주 개새끼'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헬스장에 도착해 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성적 자아가 대견한 한편, 굳이 얼마 없는 한 편끼리 싸워야 할 만큼 운동이 값어치 있는가에 대해 의문스러워지곤 한다.
운동에 대한 가치 정립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로 무리하게 움직이면 근육에 손상이 갈 수 있다(과학적으로 그렇다)(사실 아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나는 이걸 '헬스장 산책'이라고 부르는데- 운동기구 사이를 살살 걸어다닌다. 나지 않는 땀을 훔치며 다음엔 어떤 운동을 할까 고심하는 사람처럼. 산책을 하다 알게 된 건데, 헬스장에는 아주머니 회원이 정말 많다. 주거단지 가까이 있는 헬스장이라 그런지 반 이상이 아주머니다. 나는 '헬스장 내 아주머니 분포도' 같은 지도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있다면 지도 속 분포 비율은 들쑥날쑥한 양상을 띌 것이다. 특히 분포도가 높은 장소를 소개해 주고 싶다.
핫플1. 거꾸리와 덜덜이
헬스장의 남진과 나훈아, 에어프라이기와 광파오븐, 샤넬과 디올이라 할 만큼 아주머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운동기구다. 이름이 흡사 80년대 꽁트에 나오는 바보 형제의 그것 같은데, 정확한 이름은 아니고 아주머니들이 이렇게 부른다. 거꾸리는 발을 걸어서 위로 보내고 머리는 아래로 보내 척추를 쭉 늘려주는 기구다. 덜덜이는 목욕탕에 하나씩 있는 건데 벨트처럼 생겨서 작동시키면 덜덜덜덜 떨린다. 아마 한 번 씩은 봤을 거다.
특히 거꾸리는 인기가 많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아주머니들은 그 부근을 짐승의 사체를 맴도는 갈까마귀처럼 빙빙 맴돈다. 매트에서 스트레칭하는 척하면서 그 묘한 긴장감을 구경하는 게 꿀잼이다. 아주머니들은 거꾸리를 하는 와중에도 특유의 말 걸고 싶어 참을 수 없는 성향 때문에 거꾸로 매달려 이마에 핏대를 세워 가며 통성명을 하곤 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사회성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덜덜이는 정확한 효능은 모르겠으나, 안마 효과와 진동에 의한 지방 분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운동 비슷한 걸 했다는 느낌을 주는 게 가장 큰 효능. 덜덜이 이용자들은 밸트를 주로 허리나 배에 대는데 결리는 부위에 따라 종아리, 어깨, 목 등에 대기도 한다. 아직 겨드랑이 이상은 보지 못 했다. 곡예스러운 동작에 진동을 참아내는 근엄한 표정이 더해지면 수행자가 뿜어내는 모종의 경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핫플2. 탈의실 안 사우나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탈의실 안에 작은 사우나가 있다. 분포도로 치면 초과밀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은 작은 씨족사회다. 서로가 서로를 다 알고, 작은 것이라도 함께 먹을 거리를 나누고,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우나에서 뭐 잡숫지 마시라고 한 소리 하러 온 트레이너까지 앉혀 놓고 말을 시키는 개미 지옥 같은 친화력. 주로 줌바댄스할 때 입는 반짝이 옷을 얼마 주고 샀는지, 언니는 결혼도 안 한 미스처럼 젊어 보인다든지, 우리 남편이 공무원을 오래 했는데 어머 우리 남편도 공무원인데 하는 얘기를 나눈다. 그런 얘기들은 옷 갈아 입으면서 훔쳐 들어 놨다가 집 가면서 몰래 미소 짓기에 좋다.
핫플3. 그 외
헬스장 한 켠에서 초등학교 교실에 온 듯한 재잘거림이 낭랑하게 들린다. 돌아보면 5학년 3반 언니들이 운동 기구에 걸터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쪽 숄더 프레스에 앉은 아주머니가 저쪽 레그 프레스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말을 거는 풍경. 벤치프레스를 그냥 벤치로 이용해 버리는 극강의 쿨워터향에 아득해지고 만다.
- 혹시.. 이 운동기구 다 쓰신 건가요?
- 어머허어~ 나 좀 봐 이 언니랑 자함깐 얘기한다는 게 계속 있었네에~
하고 바로 옆 파워렉으로 자리를 옮겨 물 흐르듯 이야기를 이어가는 자연스러움까지. 헬스장에서 풍기는 보문천 약수터 스웩에 힙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아주머니들은 헬스장이 우리에게 요구한 이용 패턴을 타파하고 그들만의 운동 양식을 적립한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선구적이고.. 틀에 갇히지 않으며... 공동체 지향적인... 그런.. 어떤...
거꾸리에 매달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말 끝도 없는데 이래서 아주머니들이 거꾸리에서 안 내려 오시는구나 이해하게 된다. 역지사지는 어디서든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