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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안

by 빵떡씨

날짜: 2019년 1월 10일 목요일 | 날씨: 사무실 외풍 시베리아 북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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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사에 다니면 '제안(proposal)'이란 걸 한다. 예를 들어 A기업이 '※우리 회사 홍보 대신 해 줄 파티원 급구※'라고 공지를 올리면 여러 대행사가 '우리는 신문 기사도 써줄 수 있고 SNS도 운영 해줄 수 있고 갈색 똥도 싸줄 수 있고 딱딱한 똥도 싸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걸 이제 PPT 100장 정도로 써주고 그 100장 정도를 넘기다가 클라이언트 팔이 아플 수도 있으니 직접 가서 설명(=프레젠테이션)도 해주고 그런다.


제안은 21세기에 걸맞게 능력중심적인데다 민주적이기까지 한 제도다. 대행사들이 동등한 참여 기회(A기업의 팀장과 B대행사의 팀장이 아는 사이가 아닌 경우에 한함)를 얻어 능력을 어필하고, 기업이 그 중에 적합한 대행사를 골라 같이 일한다. 나는 이 시스템을 애정하고 신뢰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도 완벽할 순 없는 법. 제안에도 흠은 있다. 옥의 생활기스 같은 결함을 짚어 보려 한다.



1. 아가리는 하나, 젓가락은 여러 개

돈 많은 뚱보가 있다. 뚱보가 식사를 하려는데 살이 쪄서 팔 한 짝 올리기도 버겁다. 뚱보는 대신 밥을 먹여 줄 사람을 구한다. 그러자 사방에서 밥 좀 먹여 봤다는 애들이 쏟아져 나온다. 칼질 좀 해 본 자객은 스테이크를 썰어 주겠다 한다. 정약용도 거중기를 끼익끼익 끌고 와 '무거운 음식도 아가리 입구까지 모셔드립니다!'라고 떠든다.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콩자반을 집어 위장까지 원샷원킬로 보내주겠다 호언장담한다.


아가리는 하나인데, 먹여주겠다는 애들은 바글바글. 일을 시키는 기업은 별로 없는데 대신 해주겠다는 대행사만 우글우글. 이제부턴 대행사끼리 제 살 깎아먹기식 싸움이다. 누가누가 더 싸게 해주나 겨루는 거다. 진흙탕 싸움 수준이 거의 보령 머드축제. 결국 500원 주고 매점에서 딸기우유랑 크림빵에 빵또아까지 사다 주는 꼴이 된다. 일진들도 요즘 물가에 그렇게는 안 시키는데.


2. 제안은 돈을 안 준다

제안은 따 와야 돈이 된다. 제안하는 것 자체는 돈이 안 된다. 취업 준비할 때 면접을 아무리 많이 봐도 취직을 해야 돈을 받는 것처럼, 제안이 간택되어야만 그때부터 돈을 받는다. 그래서 제안은 주로 야근을 하며 준비한다. 업무시간 동안은 돈이 되는 '실행(제안이 성공해서 실제로 일하는 것)'을 하고, 돈이 안 되는 제안은 +α 시간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1년 밥벌이가 걸린 제안을 대충할 수도 없다. 그림판에 뽀작뽀작 그려서 대강 이런식으로 하겠소 하면 성의도 없어 뵈고 잘 알아먹지도 못 하니 디자이너가 실제와 똑같이 그래픽 작업을 해주고, 시뮬레이션 영상도 만든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의 머리통을 열고 뇌에 이차함수를 스캔해 주는 수준. 그렇게 시간 들이고 돈 들인 제안이 떨어지면 다시 그 짓의 반복이다.


3. 짜치기

(*짜치다; 수준이 모자라거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성과물 등이 3류라고 생각되는 경우에 쓰임)

100장짜리 제안서를 열어 보면 순서는 대략 이렇다. 1.상황분석(너네 물건이 이렇게나 안 팔린단다) 2.컨셉제안(세 줄 요약) 3.실행방안(진짜 이대로 할 수 있을진 알 수 없다). 첫 번째 상황분석에선 사람들이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건은 얼마나 팔리는지, 경쟁사는 어떻게 홍보하고 있는지, 트렌드는 뭔지 에베베베 다 분석한다. 두 번째 컨셉제안과 세 번째 실행방안에선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기업에 맞는 홍보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순서는 아주 이상적인 거고, 실제로는 '너희 회사는 이것도 저것도 다 문제니 그냥 불을 지르자'고 하고 싶어진다. 게다가 시간도 없으니 대행사는 '짜치는' 방법을 쓴다. 상황분석부터 하는 게 아니라 실행방안부터 정하는 거다. 일단 해외 사례를 베낀다. '왜 있잖아 요즘 많이들 하는 그런거'도 찾아서 넣는다. 만약 '이건 00기업이 한 것과 너무 비슷한데요?'라고 하면 '트렌드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 실행방안들을 싸그리 묶을 만한 컨셉을 정한다. '저희 제안 컨셉은 소확행이 아닌, 킹확행입니다! 고객들에게 버거킹은 확실한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주겠습니다!' 같은 명학산에 방구 메아리치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컨셉에 맞는 자료만 쏙쏙 골라서 상황분석 부분에 넣으면 끝.


이렇게 되면 일 하는 순서가 1.실행방안 2.컨셉제안 3.상황분석으로 거꾸로 된다. 모든 자료를 다 분석하지 않고 말 되는 것만 짜맞추면 되니 이런 갓성비가 또 없다. 이렇게 완성된 제안서는 나중에 맥확행(맥도날드는 확실한 행복)으로 바꿔서 맥도날드에도 써먹을 수 있다. 이건 소위 우라까이라고 한다.


다 쓰고 나니 뭔가 개운하게 비참하다. 동생이 이걸 우리 팀장님이 보시면 '빵떡씨 홍보대행사 다니는 그림일기'가 아니라 '다녔던' 그림일기가 될 거라고 했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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