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9년 2월 2일 토요일 | 날씨 : 폐에 미세먼지 백사장 개장
작년에 연차 15개 중에 9개를 못 썼다. 일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 연차를 쓰기까지 그 과정이 너무 귀찮았다. 대리님한테 허락 받고 팀장님한테 허락 받고 일 미리 해두고 팀원들이 백업해줄 일 정리하고... 그러느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냥 회사에 나왔다. 줘도 못 쓰는 연차.. 관성의 힘으로 나아가는 삶... 나태지옥 캐스팅 1순위......
19세까지 인생의 열심을 모두 소진하고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을 보니 남은 것은 나태뿐이었다. 게으름의 달콤함에 입맛을 다시며 귀찮음을 삶에서 배재하는 일에 골몰했다. 의사결정을 할 때도 이 일이 귀찮은가 아닌가를 가장 상위의 기준으로 놓았다. 어떤 일이든 "귀찮아.."라고 해버리면 안 해도 되는 타당한 명분이 생기는 기분. 25년 간 비만해 있는 데에도 지병 같은 만성 귀찮음이 일조했을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연말정산이란, 연말정산이란(강조) 신념을 뒤흔드는 거대한 위기다. 국세청과 이런저런 서류와 도장과 ActiveX와 공인인증서가 도원결의를 맺고 나의 행복을 함락하는 짓이 바로 연말정산이다. 지난달에도 연말정산을 하루이틀 미루며 '다만 몇 만원이라도 더 타내려면 소득공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시름시름 뒤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게을러서 받을 돈을 못 받는 게 아니라, 돈을 내고 소득공제를 안 하는 행복을 산다고 생각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생각의 전환은 중요하다. 세상을 조금만 달리 보면 누구나 정신승리의 쾌거를 누릴 수 있다.
룰루랄라 소득공제 아무것도 안 받고 연말정산을 끝내고 나니 새삼 직장이란 얼마나 비만한 귀찮음 덩어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선 인사하기, 웃기, 말하기 등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언행이 죄 귀찮다(먹기 제외). 이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나오는 언행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어거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사에서는 억지로 웃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직장인들은 항상 밥을 잘 챙겨 먹어둬야 한다. 공복 상태에서는 웃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공복의 웃음은 웃음이라기보다 바람 빼기에 가깝다. "아몬드가 죽으면 다이아몬드라구요? 아!하!하!하!"하고 웃어야 할 것이 "흐으ㅎ아ㅎ.."정도로 출력된다.
수다도 카페에서 하면 그리 흥겨운 것을 회사에서 하려면 아가리가 무거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런 이유로 누가 "아 나 잘 못 들었어"라고 하면 쓸모 없는 귓구멍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인성 대통령 같은 충동이 차오른다. 회의 시간에 비슷한 충동질을 하는 멘트로는 1.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할까? 2.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3. 뭐 생각해 온 거 있어? 등이 있다. 평소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아이디어를 잘 못 내는 사원' 포지션을 고수하는데 저런 멘트에는 먹히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맘마' '빠빠' '빠방'밖에 할 줄 모르는 것처럼 회사원은 '배고파' '졸려' '퇴근할래'만 반복한다. 간혹 긴 얘기를 할 때면 제풀에 귀찮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그때..."
"..."
"..."
"그때 뭐?"
"......말하기 귀찮아..."
"... 그래서 말하다 중간에 그만 둔거야..?"
"웅.."
"빵떡아"
"?"
"숨은 왜 쉬어..? 귀찮은데?"
"......그러게.."
이런 이유로 회사에선 아무도 말걸지 않았으면 좋겠고 마주치면 낯빛 다크초콜릿톤인 거 딱 뵈니까 안부 인사도 생략했음 좋겠고 그냥 벽장에 갇혀서 최민식이 군만두 받듯 일거리 받아서 하다가 6시에 풀려나고만 싶다. 나의 심각한 양성 귀찮음증을 밝혔으니 이 글을 쓰는데 얼마나 큰 의지가 필요했을지 다들 알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