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9년 4월 9일 화요일 | 날씨: 벚꽃라떼.. 벚꽃감자칩... 벚꽃맥주.. 벚꽃텀블러... 벚꽃네일... 체리블라썸에 미친 민족...
다른 팀 사람들에게 우리 팀은 회의할 때 화기애애해 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회의실에서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고. 그것은 우리가 회의는 안 하고 주로 노가리를 까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그다지 말도 안 섞으면서 회의 시간만 되면 그렇게 딴 소리를 해쌓는다. "이번에 고량주 홍보를..." "고량주 좋아하시는지..." "저희 장인어른이 술을 그렇게..." "선물로 조니워커 블랙라밸을..." "대학교 엠티에서 양주를..." "요즘도 엠티를 가평으로..." "가평에서 제가 번지점프를..." "세계에서 젤 높은 번지점프대가 호주에..." "호주에 워홀을 갔었는데..." "저는 독일에 갔었는데..." "그런 것 치고 독일어 실력이 썩..." "...무슨 얘기 했었죠..?" 이렇게 딴 길로 새다 보면 헨젤과 그레텔이 파리바게트 빵을 다 털어 뿌려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힘들다. 주로 팀장님이 "자 아이스브레이킹은 여기까지 하고~"하면서 노가리를 종결시키는데 만난지 1년이 넘었는데 무슨 아이스브레이킹 타령인지 참 뻔뻔스럽기도 하다. 그냥 일하기 싫어서 놀았다고 해요...
한 번은 옆 팀 대리님이 무슨 얘길 그렇게 재미있게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 팀이 무슨 얘길 하는지 생각해봤는데 주로 "우리 회사 새로 이사갈 사무실이 꽤 좁다든데" "그럼 제일 먼저 우리 팀을 떼어 놓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무슨 소리세요, 팀장님만 떼어 놓겠죠" "아하하하" "빵떡씨는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봐요?" "하하하하" "이사 가기 전에 회식이나 할까요?" "다음 달 월급도 없는데 회식비가 있겠어요?" "아하하하" 같은 내용이다. 곧이곧대로 말해주니 옆 팀 대리님이 위로해 줬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우리 팀 회의는 '감금식'으로 이루어진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전까지 회의실에서 나가지 못 한다. 다들 남의 대가리에서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쯤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결국 그 대가리가 그 대가리임으로 12시쯤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그 날도 회의실에서 아이디어의 변비를 견디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페이스북 스킨에 들어갈 슬로건이 있어야 하는데... 봄에 어울리는 문구로 다들 생각해봅시다"
"스프링 모먼트립 어때요? 봄의 순간을 즐기는 여행이라는 뜻으로 스프링이랑 모먼트, 트립을 합쳤어요"
"너무 어렵네요. 되도록 한글로. 좀 쉽게"
"여행 함께 해 봄~은 어떠세요?"
"너무 흔해요"
서로 '쟤 머리에선 왜 저런 것만 나올까' '김치 명인도 아니고 존나게 깐깐하네'하는 생각을 할 무렵 대리님이 입을 뗐다.
"함께 해서 좋은 봄 같은 건 어떨까요? 음... 줄여서 함께좋봄?"
"오오 함께좋...봄...? 좋..."
"...좋봄이요...? 좋... 뭘 보신다고요?"
팀장님의 '뭘 보신다고요?'에서 나는 이미 꺼억꺽 웃고 있었다.
"아뇨 아뇨 뭘 본다는 게 아니라 좋은 봄이라는 뜻인데 그게 제가 그런 그런 뉘앙스가 되는 줄 몰랐는데 근데 발음을 잘 하면 또 그런 느낌은 아닌데;;;;"
아니긴 뭘 아니야... 분위기가 어떻게 수습도 안 되고 아주 나가리가 났다. 우리 머리 속은 '함께좋봄'으로 가득찼다. 이미 다른 아이디어는 생각할 수 없는 뇌가 되어버렸다. 다들 아무 말도 안 하고 입 속에서 좋봄만 옹알옹알거렸다. 좋봄... 좋... 봄.. 좆.. 아니..좋...
그 날 회의는 그렇게 닦지 않은 똥처럼 찝찝하게 끝났다. 좋봄이 아직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걸 보면 사실 대리님은 희대의 카피라이터가 아닐까.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마성의 카피... 그러나 아직 우매한 시대 정신이 그녀의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이다. 대리님이 2040년 쯤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이렇게 또 한 명의 천재가 빛을 잃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