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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라이츄가 되는 이유

디질 수 없으니까 라이츄 되고 그러는 거지

by 빵떡씨

날짜: 2019년 4월 24일 수요일 | 날씨: 봄 순삭

1556064902553.jpg 너무 안 비슷해서 저작권 침해 우려 없고 개꿀

나른하다. 벌써 구독해 놓은 뉴스레터도 다 읽었고 인스타그램도 다 봤다. 인스타그램은 너무 자주 들어가서 게시물 업로드 속도가 내 접속 속도를 따라오질 못 한다. 유튜브에서 웹드라마 보고 페이스북도 다 훑었다. 나는 디지털 파트라서 업무 시간에 맘 놓고 SNS를 할 수 있다. 누가 뭐 하냐고 물어보면 "트렌드 파악 중입니다"라고 하면 된다. 대신 보면서 절대 처웃으면 안 되고, 미간에 힘 딱 주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중간중간 뭔가 인사이트를 캐치한 듯 끄덕거리면 금상첨화. 메모하는 척은 옵션.




북미정상회담 기사 읽는 표정으로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를 세 편 봤다. 그런데도 아직 11시가 안 됐다. 나는 요즘 일이 없다. 입사 이례로 가장 한가하다. 올해 쓴 모든 제안서가 광탈했기 때문이다. 팀원들의 무능력이 조금씩 모여 1분기 수주율 0%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뜻 깊다. 2월쯤에 "이러다 상반기 내내 노는 거 아냐~ㅎ"하고 깔깔 농담했었는데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빵떡의 상상은 현실이 되고 지랄일까.




나는 2월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매우 흡족했다. 돈은 똑같이 받으면서 일은 덜 했으니까. 인센티브가 끊긴 팀장님이랑 대리님이야 속이 타겠지만 원래 인센티브가 없던 나는 타격이 전혀 없었다. 이래서 사원이 좋구나. 나는 먹여 살릴 가족도 없고 갚을 카드값도 없다. 원래 쥐좆만큼 받았으니 계속 쥐좆만큼 받아도 아무 상관없다. 의외의 포인트에서 사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뿌듯해했다. 팀장님과 대리님의 비통한 표정도 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그러던 게 한 달 두 달이 가고 없던 일이 점점 더 없어져갔다.


'아 오늘은 뭐하지'


'명함으로 키보드 때를 팔까'


할 일이 없으니 안 그래도 긴 업무 시간이 유플러스 3G처럼 느리게 갔다. 파쇄기 청소를 하고 정수기 물통을 비워도 시간이 가질 않았다. 예전에 한창 바쁠 땐 오전 시간은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후도 정신차리면 세 시, 정신차리면 여섯 시였는데. 요즘은 한참 지났겠지 싶어 시계를 봐도 7분 지나 있고 또 한참 있다 시계를 봐도 4분 지나 있고 그렇다. 시간의 흐름이 플랭크 할 때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청춘이 흘러가는 것을 굉장히 아까워하는 사람인데 이럴 땐 조금 빨리 흘러도 괜찮을 것 같다.




'아 이것은 고문이다'


'회사생활이 초창기 TV조선 만큼이나 지루하다'


게다가 팀이 계속 돈을 못 버니 자본주의적이고 근본적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가 내게 월급을 줄 돈은 있을까. 이러다 짤리는 건 아닐까. 사실 짤리면 실업급여 나오고 개꿀이긴 한데... 더 생각하면 제발 짤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관두었다. 차라리 내 직급을 인턴으로 다운그레이드 해서 돈도 덜 주고 일도 덜 시키면 어떨까. 대신 복지 좋은 인턴이어야 한다. 6시에 칼퇴 시켜주고, 클라이언트랑 커뮤니케이션 안 시키고, 어려운 엑셀 작업 안 시키고, 자잘한 심부름이나 박스포장은 시키지만 커피 심부름은 절대 안 시키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게 해야 한다. 적게 벌고 평생 인턴으로 살아도 나쁘지 않겠는 걸.




지속가능한 인턴 생활을 구상하는 차에 여기저기서 메일과 카톡이 왔다. 뭐여. 일이 없어서 메일 올 일도 없는데 무슨 일일까. 받은 편지함에 들어갔다.


'인사발령이 하기와 같이 결정되었으므로 공고합니다.


발령일자: 2019년 5월 1일


[승진]


PR3팀 빵떡씨 대리 진급


위와 같이 인사 발령함'




?????


대리요..? 제가요?? 나는 아직 만 2년도 안 됐는데 대리라니. 일도 없는데 대리라니. 월급도 안 올려 줄 거면서 대리라니.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대리라니. 인턴 하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 대리라니. 새로운 수능 금지곡 <대리라니>를 발매해도 될 만큼 '대리라니'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드라마 보면 승진했다고 막 기뻐하고 축하받고 그러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쁘지... 마침 팀장님도 승진 축하 문자를 보내주셨다. '빵떡씨도 이제 대리니까 더 열심히 하셔야죠' 왜 월급은 안 오르는데 열심만 오르나요. 역시 나쁜 기분 북돋워주는 건 우리 팀장님밖에 없다.




집에 와서 동생에게 승진 소식을 알렸다.


"나 승진했다. 근데 왜 승진했는지 잘 모르겠다"


"너네 요즘 돈도 못 벌어 온다며"


"그러니까"


"음... 야 포켓몬이 언제 진화해"


"... 지 꼴릴 때 하겠지"


"아니지. 스토리 전개상 필요할 때 진화하지. 예를 들어 존나 쎈 적을 만났어. 근데 지우 이 새끼가 적당히 안 빼주고 '너만 믿는다!! 야! 너만 믿는다고!' 이 지랄 하면서 몬스터볼에 안 넣어줘. 그럼 이제 피카츄는 어떻게 해야 돼. 디질 수 없으니까 라이츄 되고 그러는 거지"


"...나도 대리로 진화해서 어떻게든 팀을 살리라는 뜻이야?"


"이해가 빠른 편이네"




명쾌한 비유다. 듣고 나니 깨달음을 얻는 기분이었다. 승진하고도 기분이 나쁜 이유가 이거였구나. 라이츄도 나 같은 기분이었을까. 지우는 진화했다고 더 쎈 놈들이랑 싸움 붙이고... 피카츄 시절 쓰던 능력은 못 쓰고... 피카츄였을 때보다 사람들한테 인기도 없고... 지우는 계속 노동 착취하고... 난 라이츄를 생각하며 눈물지었다. 포켓몬스터가 이렇게 슬픈 만화였나. 진화든 승진이든 생각만큼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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