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사가 어떤 브랜드냐에 따라 일에 대한 흥미와 열정도 달라진다. 내가 관심 있는 브랜드를 맡으면 그나마 손가락을 움직여 키보드를 칠 의지가 생기고, 그나마 야근할 때 헛구역질을 덜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고객사를 맡은 적은 없다. 지금까지 맡은 브랜드는 리조트… 유제품… 관공서… 학습지… 강연… 정도였다. 심장이 요만큼도 요동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나와 대리님은 언제나 화장품 브랜드나 패션 브랜드를 맡고 싶어 했다.
“내가 화장품 브랜드 담당하잖아? 그럼 진짜 영혼 갈아 넣어서 홍보한다”
“대리님, 저는 제 돈 쏟아 부어서 그 브랜드 제품 살 거에요”
그러나 딱히 갈아 넣을 영혼도, 쏟아 부을 돈도 없어서였을까. 우리의 워너비 브랜드들은 항상 손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다.
사실 우리 팀은 몇 개월 째 고객사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브랜드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돈만 준다면야 깨진 세숫대야라도 이것이 요즘 유행인 레트로라는 둥, 옥색 컬러감이 팬톤 올해의 컬러 뺨싸다구 치게 곱다는 둥 하며 팔아야 했다. 입사 2년째인 마당에 그런 아가리는 못 털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고객사 하나를 덜컥 수주하게 되었다. 나는 회사에서 웬만하면 막 크게 웃고 좋아하고 그러지 않는데 너무 오랜만의 수주라 팀원들과 다 함께 좋아했다. 제안서를 하도 많이 써서 어디를 수주했는지도 모르고 마냥 좋아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디 된 건데요?”
“B회사!”
아… 그런 데가 있었지… 대리님과 나는 서로 짝짜꿍 부딪히던 손을 내리고 경건히 차렷했다. B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군대… 국방… 무기… 그런 것과 관련된 곳이다. 더 말했다간 기밀 누설죄로 압송될 것 같으니 말을 줄이겠다.
이제 대리님과 나는 큰 일이 났다. 우리는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여성으로 무기나 국방에 대해서는 일절 몰랐다. 아까 깨진 세숫대야 어쩌구 한 건 다 개소리고 나는 의욕을 아주 상실해버렸다. 레드 벨벳 립스틱을 바라던 사람한테 레드 피 튀기는 무기라뇨….
나는 울면서 스터디를 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역사>, <무기 바이블>, <세계를 뒤바꾼 무기>, <국방 백과>,,, 책부터 나무위키까지 관련된 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사(NASA) 홈페이지까지 들어갔을 때는 이과와 영문학도에게 쥐어 터지는 듯한 고통에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군필자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전차와 장갑차의 차이부터 소총과 기관총의 차이까지 침을 기관총처럼 발사하며 설명했다.
“소총의 총구부터 방아쇠까지 이 긴 부분을 총열이라고 해.”
“총렬”
“총열”
“총렬”
“아니 지상렬할 때 렬 말고 오열할 때 열!”
“아 지상렬할 때 렬 말고….”
오열하고 싶었다.
“후… 그리고 이 부분은 개머리판.”
“개머리판? 이름이 뭐 그래? 히힣 웃기닿 개머리ㅎㅎㅎ”
“…웃겨…?”
“…웅ㅎ…”
“…빵떡아”
“웅…”
“이거 네가 홍보 맡아도 괜찮은 걸까”
그니까… 내 말이 그 말이거든…
아, 인간이란 종족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아이폰 신 모델 내놓듯이 쏟아냈을까. 나처럼 박애주의적인 사람은 신념에 위배되어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사람이어서 도로 앉았다.
아무리 일어섰다 앉아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건 밀덕이 되어야만 홍보를 할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니기 위해 취향도 바꿔야 하다니. 이제 취미 생활로 소총이랑 전차 피규어 사 모으고… 침대 맡에 주르륵 올려놓고 “내 M16 너무 예뻐…!” 하면서 감탄하고… 옥션에 길리슈트 주문해서 할로윈 데이에 입고 이태원에 가고… 퇴근 후엔 PC방 달려가서 배그를하는… 열렬한 밀덕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갑자기 대행사의 삶이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동기 언니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언니 내가 일 때문에 취향까지 바꿔야 해? 나 정말 속상하다?!”
“빵떡이 속상하구나”
“으응 말이라구~”
“나는 고객사가 성인용품 브랜드여서 노트북만 키면 성인 사이트 팝업창이 버팔로 무리처럼 우두두두 뜬단다. 하루의 시작을 그 수십 개의 팝업창 닫는 거로 시작해…”
언니는 성인용품을 너무 많이 검색한 탓에 구글 맞춤 광고에 그렇게 우머나이져가 뜬다고 했다.
일이란 무엇일까. 대리가 되었는데도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그만 아득해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카모플라쥬 모양의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