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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18. 2019

[글로그 12] 여전히 비관적이고 욕을 많이 하는

아주 살맛나는 씨발이었다

최근에 회사가 이사를 했다. 원래는 원남동에 있었다. '원남동? 연남동 아니고 원남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원남동은 혜화-종로-을지로 사이에 있는 동네다. 세 지점 사이에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존재해 한 번 발을 들이면 무엇도 흥하지 못 한다. 우리 회사는 혜화역, 종로3가역, 종로5가역으로 출퇴근이 가능했지만 세 역의 딱 정중앙에 있어 어디 하나 가깝지 않았다. 역세권이라 하기엔 존나 억울한 느낌. 회사 주변으로는 의료기기 판매점, 조명 가게, 철물점, 방앗간 등이 뒤엉켜 있었다. 음식점은 씨가 말라 쌍다리 불백 같은 평타치는 프렌차이즈라도 하나 생기면 회사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었다. 겨울엔 회색빛이 동네 전체를 을씨년스럽게 감돌았다. 회사 건물은 유난히 춥기까지 했다. 두 번의 겨울을 원남동에서 보냈다. 긴 겨울이었다.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간 경미한 우울증을 앓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회사가 이사를 결정했다. 전셋값 때문이었다. 건물주는 무슨 배짱으로 손 대면 톡하고 부서질 것 같은 이 낡은 건물의 전셋값을 올리려 했을까. 이 비루한 환경에 전셋값까지 오른다면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 회사는 을지로 패스트파이브로 이사를 했다. 패스트파이브는 요즘 핫하고 비싼 공유 오피스다. 공유 오피스는 셰어하우스와 비교해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여러 회사가 한 건물의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쓰는 거다. 사무실 크기는 전보다 훨씬 좁아졌다. 등을 마주한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서면 의자끼리 부딪혀 반동으로 다시 착석할 정도다. 우리회사가 중소기업도 못 되는 좆소기업이라 직원이 적은 건 다행이다.



사무실은 좆만하지만 시설은 좋다. 공용공간에는 널찍한 소파도 있고 도서관처럼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공용 공간도 있다. 라운지에서는 시리얼, 커피, 맥주 등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아침에 시리얼 한 사바리 말아 청계천이 보이는 창가에서 와작와작 먹으면 개꿀이다. 2주 정도 아침점심으로 시리얼만 먹었더니 인중에서 곡물 향이 나는 것 같다. 그래놀라 정도로 바꿔주면 물리지 않을 텐데.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다.



이런 연유들로 나는 지난 주까지만 해도 이사뽕에 취해있었다. '이 정도면 꽤나 다닐만 하다'. 하지만 그 뽕도 채 3주를 못 갔다. 처음엔 부럽다 좋겠다 하던 지인들도 심드렁해져 '그만 말하렴 너희 회사에 관한 박사학위를 받을 것 같아'하는 반응이 되었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인 호랑이 근처에서 일한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회사에서 2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호랑은 반가워했다. 패스트파이브에 꼭 와보고 싶다고도 했다. 보아하니 내가 반갑다기보다 패스트파이브에 들어올 인간 출입증이 생겨 기쁜 것 같았다. 나도 새로운 자랑의 제물이 등장해 기뻤으므로 우린 점심 시간에 보기로 했다.



졸업 후 처음 보는 호랑이 어떻게 변했을까 싶었다. 물론 못 알아 볼 위험은 없었다. 호랑은 내 지인 중 가장 커다랗기 때문이다. 손이고 발이고 뭐든 커다랬다. 가끔 호랑의 몸으로 산다면 무서울 게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회사 로비에서 호랑을 기다렸다. 몸집에 비해 협소한 회전문을 통과하는 호랑이 보였다. 날 발견한 호랑은 커다란 손을 펼쳤다. 손바닥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인사를 대신하는 스타일이다.



"호랑아!"

"야 니 늙었나?"

"아니 무슨 화장 안 해서 그래"

"늙었네 뭐"

"호랑은 여전하네"

여전히 재수없다는 뜻이다. 호랑은 입을 떼자마자 정이 TTOLK 떨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다. 호랑은 부산 사람이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사투리를 쓴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표준어를 썼다면 나는 약간 낯설었을 것 같다. 그는 큰 몸뚱이를 이리저리 비척거리며 걸었다. 그의 오래된 버릇이다. 호랑의 운동화는 앞부분만 닳아 있는 게 아닌지 가끔 궁금하다. 호랑은 대학 동기이긴 하나 나보다 다섯 살이 많다. 4년 간 이런저런 풍파와 방황을 거치고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호랑은 대학 동기들 중에서도 조금 특별하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 사귄 친구이기 때문이다. 호랑은 언제나 그 사실을 힘주어 말한다.

"야 내가 니 스무살 때부터 아니 니 빠른이니까 열아홉 살 때부터 봤다이가. 그것도 오티에서 니 안경 쓸 때부터 그 라섹하기 전에 핰컄컄ㅋ. 그때 니 고등학생 때 미술 공부 했다 그랬다이가. 홍대 예술학과 갈라다가 일로 왔다고. 니 그때 말도 못 하게 촌스러웠는데"

지는 어떤 꼴이었는지 잊었나보다. 호랑은 만날 때마다 이 레퍼토리를 읊어댄다. 이건 마치 기억도 안 나는 작은삼촌이 "너 임마 똥기저귀 찰 때부터 내가 업어 키웠어"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어쩌라고요..'라고 답해주고 싶다.



호랑은 패스트파이브를 구경하고 싶어 했다. 나와 호랑은 10층으로 올라갔다.

"야 패스트파이브 좋네에. 야 시리얼 먹어도 되나? 아 아이다.. 이까지 와서 시리얼을... 아 안 될 말이다. 체면이 있지. 야 커피 이거 라떼도 되나? 달게는 안 되나? 야 저기 저기 창가 가서 먹자"

나는 이 크고 산만한 생명체 때문에 순식간에 정신이 없어졌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서로의 회사가 얼마나 망해가는지, 평소에 어떤 일을 하는지, 행복한지에 대해 얘기했다. 호랑은 졸업하자마자 프로덕션을 차려 2년 정도 운영하고 있다. '저 새끼 언제쯤 망할까'가 내 관전 포인트다. 호랑은 돈 되는 영상은 다 찍는다고 했다. 평소엔 혼자서 일하고 일거리가 들어오면 주변 프리랜서 친구들과 함께 작업한다고 했다. 필요할 때만 뭉치는 조립식 업무 관계라. 호랑에게 잘 맞는 방식일 것 같았다. 아마 호랑이 어떤 집단에 속해 일한다고 했다면 나는 놀랐을 것이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얌전히 앉아 그걸 처리하는 호랑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회사원 호랑은 곧 좀이 쑤셔 그 큰 주먹으로 눈에 보이는 걸 다 아작냈을 것이다.



호랑은 대학에 다닐 때부터 영상 제작에 관심이 많았다. 뭔가를 만들어 내는 건 호랑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어딘가 번뜩이는 데가 있었다. 발표나 과제를 할 때면 그냥 잘 만든 게 아니라 남들과 전혀 다른 걸 가져왔다. 나는 호랑의 머리속 회로는 굉장히 특별하거나 굉장히 잘못 돼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느 면으로든 호랑의 '다름'은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내 생각에 호랑의 유별남은 유전자의 힘이 작용한 게 분명했다. 호랑의 형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호랑에게서 그의 형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수영장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날, 고등학생이었던 호랑의 형은 학교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지극히도 무더웠던 호랑의 형은 겨우 샤워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비닐로 샤워실 바닥과 벽을 싹 다 막고 거기 물을 채워 수영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호랑의 형은 물을 발목 정도까지 채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다메요였다. 비닐이 수압을 이기지 못 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물은 샤워실 문틈 새로 흘러 계단에 소박한 시냇물을 만들었다. 수영장을 완성시키진 못 했지만 그 일로 호랑의 형은 학교의 전설이 되었다. 나는 이런 류의 청소년 어드벤쳐에 열광한다. 이야기꾼인 호랑이 분명 MSG를 쳤겠으나 재미있으니 그만이었다.



호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다. 호랑 같은 사람과 다니면 에피소드가 저절로 생긴다. 그 중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호랑과 길을 가는 중이었다.

"하 쒸이발 야 과제가 이게 말이 되나?"

"그러게... 근데 호랑은 어떻게 그렇게 욕을 잘 해?"

실로 그랬다. 그가 발음하는 씨발의 악센트와 성량, 음의 높낮이는 청신경이 팡팡 터지게 상쾌한 것이었다.

"아 나는 사실 씨발에 특화되어 있다. 씨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근데 씨발이 진짜 좋은 게 씨발은 어떤 상황에서든 쓸 수 있다. 봐봐라. 시발..? 하면 약간 뭐지?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고, 아 씨발! 하면 약간 빡친 거고, 쒸이바알!! 하면 진짜 개빡친 거고 오!! 오 씨발! 하면 기분이 존나 좋은 거다. 니 모든 상황에서 강도를 조절하면서 쓸 수있는 감탄사 본 적 있나? 없다. 씨발밖에 없다."

호랑은 마치 씨발을 개발한 사람처럼 열과 성을 다해 말했다. 호랑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갑작스레 귓가에 때려박힌 씨발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봤다. 내가 옆에서 좋다고 캌캌대며 웃으니 그는 더 다양한 씨발을 선보였다. 그는 대단한 씨바셜리스트였다.

단어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그 단어의 의미와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씨발은 호랑의 입에서 나올 때 가장 씨발다웠다. 아주 살맛 나는 씨발이었다.



호랑과 나는 창가에 앉아 을지로 사거리의 작고 바쁜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 저새끼 저거 운전을 즈따위로 하면 안 돼. 글러먹었어. 저런 거는 자율주행 나올 때까지 집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돼. 근데 뭐 자율주행은 씨발 어느 세월에 나오는데"

"아 호랑은 여전하네"

"그렇지. 나는 여전히 세상에 비관적이고 여전히 욕을 많이 하지"

대학생이었을 때의 나는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봤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런 나에게 호랑의 태도는 새로운 대안이었다. 그는 부끄러움도 없었고, 아니 부끄러워도 해냈고, 당황스러운 일들도 "조땠네"로 일갈해버렸다. 그 모든 망한 일들은 열심히 희화했다가 남들을 웃기는 데 써먹었다. 나는 호랑을 보며 삶을 여러 에피소드의 집합체로 보는 법을 배웠다. 뭔가가 잘 안 되도 그냥 재미있는 일 하나가 늘었다고 여기는 법. 나는 난처해질 때면 '호랑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분명 호랑이라면 킼킼 웃다가 "시바 뭐 어쩌겠나"하며 넘겨버리겠지. 호랑을 떠올리는 방법은 나를 덜 동동거리며 살게 해주었다.



대학생 때 호랑과 보냈던 공강 시간 같은 점심이 지났다.

"호랑, 계속 비관적이고 욕 많이 하는 사람이어야 해"

나는 헤어지며 호랑에게 당부했다. 호랑은 대답 대신 공수도 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쪽팔려서 휙 돌아 사무실로 갔다. 호랑도 2분 떨어진 어딘가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마 나는 이제 호랑과 오래도록 만나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살갑게 누굴 찾아 만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근처 어디에선가 호랑이 시발시발하며 일 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수월해진다.



+회사로그 05. 15

이사한 곳을 자랑할 때 항상 보여주는 사진. 하지만 여기가 이 건물에서 제일 좋은 공간이다. 이 이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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