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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17. 2019

[글로그 13] 슬픈 젖꼭지 증후군

"말하자면...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집에 가서 혼자 잠드는 기분이에요"

"야 슬픈 젖꼭지 증후군이라는 게 있대"


 "야동 제목이야?"


 "..."


 "모"


 "...혼자서 자기 젖꼭지를 만지면 슬픈 기분이 드는 증후군이래"


효석은 상종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훠이훠이 젓고 방으로 들어갔다. 음... 약간 서정적인 스토리가 가미된 야동인 줄 알았다. 내 어리석음과 저질 의식을 깊이 반성한다.




세상엔 정말 많은 증후군이 있다. 얼마 전 뉴스 기사에선 '패스워드 증후군'이라는 걸 읽었다. 이게 뭐냐면 현대인(기사에선 우리를 보통 이렇게 부른다)들이 너무 많은 비밀번호를 설정해서 그것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어 혼란에 빠지는 현상이다. 끄덕끄덕. 나도 자주 까먹어서 공감됐다. 근데 공감은 되는데 이걸 증후군이라고 할 것까지 있을까. 근데 증후군이 무슨 뜻이지. 나는 문득 증후군의 뜻이 궁금해져 검색 해봤다.




마르지 않는 정보의 샘 나무위키에 따르면, 증후군은 어떤 병에서 두 가지 이상의 '증후'가 발견될 때, 여러 증후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영어 표현인 신드롬도 많이 사용하는데, 의대에선 농담처럼 잘 모르는 병이면 죄다 신드롬을 갖다 붙이면 된다고 한다(의대식 농담일까). 꼭 의학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용어로도 쓰인다. 여러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도 증후군이라고 부른다고. 패스워드 증후군도 사회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다. 참고로 나무위키에 '증후군'을 검색하면 오만 증후군이 다 나온다. 회사에서 무료하면 자료조사 하는 척하고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 별 뜻 없구나!'


개운하게 드러누워 있는데 영이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영이에게 새로운 지식을 공유해 주었다.


 "영아, 슬픈 젖꼭지 증후군이라는 게 있대"


 "뭐야 옛날 애로영화 제목 같네"


나는 영이가 나와 비슷하게 멍청하다는 게 너무 놀랍고 기뻤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얼마나 잘 맞고, 얼마나 운명인지 한참 떠들었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도 운명의 열쇠를 찾아 힘껏 과장해 말하길 좋아한다. 옆에서 보면 엄청 실없어 보인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슬픈 젖꼭지 증후군에 대해 설명했다. 영이는 슬픈 젖꼭지 증후군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너무 온갖 거에 증후군을 갖다 붙이는 거 아니야?"


 "응 그래서 모든 것을 신드롬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현상으로 '신드롬 신드롬'도 있대"


 "그건 어디서 본 거야?"


 "나무위키"


영이는 나무위키에서 봤다니 쉽게 수긍했다. 우리는 슬픈 젖꼭지 증후군의 원인과 실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효석이 해봤는데 쪼끔 슬퍼지는 것 같기도 하대"


 "걔는 평소에도 슬프잖아"


 "모 그렇기도 한데.. 그래도 이렇게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몽글몽글 만져봤을 때..."


 "저기... 그런 얘긴 상상되니까 굳이 안 해줘도 돼"


나는 잠시 혼자 젖꼭지를 매만지는 효석에 대해 생각했다. 영이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잠시 조용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어떤 과학자가 슬픈 젖꼭지 증후군을 실험하려고 실험자를 모집한 거야. 보통 대학교에서 임상실험을 하면 문화상품권 오만 원 정도 주거든. 그래서 열댓 명의 실험자들이 오만 원을 받기 위해 모였어. 실험자들은 방에 빙 둘러 앉았지. 과학자는 실험자들을 보면서 말했어.


 '자 모두 자신의 젖꼭지를 만지세요. 그리고 어떤 기분이 드는지 적어주세요'


실험자들은 젖꼭지를 만지기 시작했어. 한참 젖꼭지를 만지던 실험자들은 이런 생각이 들었지.


 '내가 오만 원을 받으려고. 모르는 사람들이랑 둘러 앉아서. 젖꼭지를 만지고 있다니'


그래 모두들 현타가 온 거야. 그래서 종이에 다들 적는 거지.  '슬프다. 우울하다. 좆 같다 아니 젖 같다'


실험이 끝나고 결과지를 본 과학자는 깜짝 놀라는 거야. '자신의 젖꼭지를 만지니 슬퍼지는군! 유레카!'


해서 슬픈 젖꼭지 증후군이 검증되는 거지"




나는 너무 그럴싸해서 맞다고, 정말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슬픈 젖꼭지 증후군을 검색했다. 하지만 슬픈 젖꼭지 증후군의 유래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랐다. 슬픈 젖꼭지 증후군은 'Sad Nipple Syndrome'이란 이름으로 외국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이 증상을 느끼는 사람들은 젖꼭지를 만질 때 드는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집에 가서 혼자 잠드는 기분이에요"


나는 이 사람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젖꼭지를 만지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우주 먼지 같은 아련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한 생물학과 교수가 추측건대, 뇌의 변연계(동기와 정서를 담당하는 대뇌의 여러 구조물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증상으로는 'D-MER(Dysphoric milk ejection reflex)'이 있다. 이는 모유 수유를 하는 여성이 불쾌감을 느끼는 증상이다. 모유가 나오려면 '프로락틴'이라는 호르몬 분비가 증가하는데 일부 여성은 이 때 즐거움을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불규칙적으로 줄어들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물론 슬픈 젖꼭지 증후군은 산모가 아니어도 남녀 모두 종종 느끼는 현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단체 실험으로 인한 현타설'이 맞지 않아 약간 실망했다. 영이와 전화를 끊고 슬픈 젖꼭지 증후군에 대해 더 찾아봤다. 하지만 이 이상의 자세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네이트 판이나 커뮤니티에 올라온 '내가 왠지 저 증후군인 것 같다'는 글만 몇 개 볼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젖꼭지를 만지는 행위가 슬픔의 직접적인 원인인지 생각했다. 혹시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젖꼭지를 만진 게 아닐까. 그 사람은 팔꿈치를 만지건 발바닥을 만지건 슬펐을 게 분명한데 하필 젖꼭지를 만진 거다. 흠 아무래도 알 수 없겠지.




각자의 감정들을 뭉뚱그려 이름을 붙이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감정은 변연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혹은 호르몬... 측두엽은 어떤가요..' 운운 하며 원인을 추측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감정은 모두 개별적이어서 그 이유도 모두 제각각이 아닐까. 감정은 어린 날의 어떤 경험, 부모님의 성격, 전에 들었던 말 한 마디, 요즘 겪는 스트레스 등등 그 모든 개인 경험의 결과물로 탄생하니까. 그러니 젖꼭지를 만진 친구가 우울을 호소한다면 '너는 슬픈 젖꼭지 증후군이다'라고 하는 것보다 그 애의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변연계에 있는 슬픔보다 이야기 속에 있는 슬픔이 그나마 위로하기 쉬울 테니까.




뭐 그런 생각으로 효석의 방 문을 두드렸다가 야동 보는 누나랑은 대화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십새끼 그거 볼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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