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로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Jun 03. 2019

[글로그 16] 추억 속의 연립주택

장미는 매 해 새롭게 폈고 주택은 매 해 새롭게 낡았다.

7021번 버스는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이 종점이다. 을지로에서 퇴근하는 나는 텅 빈 7021번 버스에서 안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직장인에겐 흔치 않은 호사다. 내 최애석은 아늑한 맨 뒷 자리 창가쪽이다. 거기 앉아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는다. 그러고 대여섯 정거장 지나면 졸음이 쏟아진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가 우두두두 흔들리는 통에 고개를 원위치로 가져왔다가 뒷목이 뻐근해 다시 창에 기대었다가... 그러길 반복하다 짜증이 난 상태로 잠이 든다. 가누지 못 하는 고개는  좌로 30˚ 우로 60˚ 갈팡질팡한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그 날은 짧지 않은 시간을 자고도 자아가 '잠을 더 주어라 더 주어라' 하다 보니 내려야 할 곳을 서너 정거장 지나 있었다. 나는 어른답게 상황을 파악하고 침착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침착은 했으나 빡도 쳤기 때문에 시발시발 하며 내렸다. 보아하니 명지전문대 앞이었다. 집까지 2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맞은편에서 버스를 타고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퇴근 시간의 아비규환이 떠올라 그냥 걸었다.




'은평구입니다. 안녕히가세요'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서대문구와 은평구의 경계쯤 되는 곳인 것 같았다. 그 일대엔 낮고 낡은 건물들이 많았다. 동네가 바랬다는 느낌이었다. 비 온 뒤라 축축한 흙 냄새가 났다. 동네와 냄새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건물 상가엔 오래 전에 유명했다가 지금은 잠잠한 브랜드가 많았다. '쌈지'라든가 '디델리' 같은 브랜드들이 그랬다. 디델리를 지나며 안을 들여다 봤다. 빨간 앞치마를 한 아주머니가 역시 빨간 다이어리형 케이스를 끼운 핸드폰을 무심히 들여다 보고있었다.



오래된 것들은 어딘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부스러진 벽, 어그러진 창틀, 붉고 푸른 녹, 해진 천. 그런 것들은 더럽고 위험한 기운을 풍기지만 그럼에도 계속 들여다 보게 되는 뭔가가 있다.




낡은 것에서 낡은 것으로 눈을 옮겨가며 열심히 보았다. 그 중에 흰 연립주택(더 이상 희진 않지만)에 특히 눈이 갔다. 서두를 일도 없고 해 서서 여기저기 뜯어 봤다. 3층짜리 주택이었다. 'A(가)동 1-2'라고 쓰인 팻말 위에 비둘기 변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래된 것은 진회색에 가까웠고 새 것은 아주 흰 색이었다. 외벽은 세피아톤이었다. 창은 모서리 틈틈에 때가 껴 똑부러진 직사각형이 아니라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이었다. 주택 앞 담장엔 장미가 새빨갛게 피어 있었다. 장미는 매 해 새롭게 폈고 주택은 매 해 새롭게 낡았다.




A(가)동 1층 창 안으로 널어 놓은 꽃무늬 이불이 보였다. 2층 창가엔 낡아서 하늘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옥빛이 된 지구본이 있었다. 지구도 늙을 만한 세월이 흘렀다. 연립주택의 구석구석을 훑던 중에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 근처에 살았다는 게 기억났다. 나는 서대문구 홍은동과 경계를 맞댄 은평구 응암동에 1년 동안 살았었다. 왜 이제서야 생각났을까. 내 고향은 경상북도 경산이었다. 내가 10살 되던 해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서울 응암동으로 이사를 왔다. IMF 때문에 아빠가 직장을 그만둬 경산의 집을 빼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추측인 이유는 내가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들었을 때 왠지 슬플 것 같으면 물어보지 않는다.




약 15년 전의 응암동은 서울의 변두리 같은 곳이었다. 특히 내가 살던 곳은 재개발 소리가 꾸준히 나오던 언덕배기 동네였다. 학교에 갈 땐 비탈을 우다다 뛰어 내려갔다 집에 올 땐 흐느적 흐느적 걸어 올라오곤 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길이라기보다 틈에 가까운 골목이 많았다. 어른들은 살기 피로한 동네라도 곧 재개발이 된다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했다. 나는 살기 힘든 줄은 전혀 몰랐고 그저 친구들이랑 컵떡볶이 먹고 쏘다니고 그랬다.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꼭 지금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연립 주택에 살았다. 주택 세 개가 한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구조였다. 아랫마당에 주택 두 개, 윗마당에 주택 한 개가 있었다. 말 했다시피 언덕배기 동네였어서 한 마을 안에도 위 아래가 있었다.




나는 아랫마당 왼쪽 건물에 살았다. 아랫마당 두 주택 사이에는 공터가 있었다. 윗마당 건물 앞에도 작은 공터가 있었다. 윗마당 건물 뒤엔 장독대를 다닥다닥 모다둔 공간이 있었다. 우리집 건물 아래엔 지하실이 있었다. 지하실 문을 열면 차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쳤다. 천장에 달린 줄을 당기면 딸깍 하며 노란 전구가 켜졌다. 시멘트가 덕지덕지 칠해진 계단을 내려가면 양파나 쌀, 고구마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이 비밀스러운 지하실에 갈 때마다 아랫배가 저리고 오줌이 마려운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연립주택의 구조는 10세 어린이가 놀기에 더 없이 좋았다. 골목은 좁으면 좁을 수록, 숨겨진 공간은 많으면 많을 수록 다이나믹하 놀 수 있었다.




한 번은 윗마당에 사는 여자애랑 나랑 내 동생 효석이 셋이 윗마당 공터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술래는 철 사다리 위에 고개를 숙이고 노래를 불렀다. 여자애가 술래였다. 효석과 나는 "무궁화아~ 꼬옻이~ 피었습니다!"노래에 맞춰 슬금슬금 전진했다. 여자애는 효석과 내가 가까워지자 노래를 점점 짧게 부르기 시작했다 "무궁화 꽃이 피어씀다!" "무과 꼬치 펴씀다!" 스톱모션처럼 움직이던 효석은 몸이 근질거렸던 것 같다. 효석은 여자애가 사다리에 고개를 묻자 마자 와락 달겨들었다. 여자애는 순간적으로 몸을 휙 피했다. 효석은 그대로 대가리를 철 사다리에 처박았다. 효석은 안면을 붙잡고 나뒹굴었다. 여자애는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이 사건에 아무 혐의가 없는 내가 꽥꽥 고함을 쳐 어른들을 불러왔다. 효석은 울고불고 하는 와중에도 아득바득 여자애를 탓했다. 그 후로 셋이 같이 논 적이 있었던가 하면 기억이 흐릿하다.




연립주택을 보고 있으니 그런 기억들이 얼핏얼핏 떠올랐다. 6하원칙이 적용된 제대로 된 기억이라기 보다 몇 가지 장면만 남은 기억들이었다. 일의 원인과 결과는 거의 까먹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때의 기분이나 분위기, 냄새 같은 건 정확히 기억났다. 어릴 때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 내용이 증발해도 감정은 그 자리에 얼룩으로 남나보다. 그래서 연립주택처럼 어릴 때를 떠오르게 하뭔가를 보면 정확히 알기 힘든 감정이 올라온다.




과거는 몸 속에서 발효되거나 녹이 슬어서 어떤식으로든 지금의 내게 영향을 준다. 교통편만 타면 엄청나게 잘 자는 것도 과거의 작용일까. 아니 그건 그냥 잠이 많은 거겠지.




+ 전세로그 06. 03

우리 집의 생명체들은 지나치게 크게 자라는 경향이 있다. 10년 키운 거북이는 처음보다 10배 더 커졌고 지금 키우는 달팽이는 손바닥 만하다. 뭐 굳이 동물까지 안 가도 나와 효석만 보더라도...


회사에서 가져온 식물(이름 모름)도 집에 가져오니 식물원이 되고 있다. 내 최애 토토로 칸에 올려두었다. 식물과 토토로가 함께 있는 건 왠지 당연해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로그 15] 대작가의 고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