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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Jun 05. 2019

[글로그 17] 개인주의자의 방

"내 방 너무 좋아.. 귀여워..."

내 동생 효석의 방을 보면 일단 작다. 우리 집에 방이 총 세 개인데 그 중에 큰 방은 내가 쓰고 작은 방 하나는 효석이 쓰고, 나머지 하나는 다용도실이다. 전세값 기여도에 따른 공정한 분배다. 


효석도 처음부터 작은 방을 쓰고 싶다고 했다. 정말이다. 아지트 같이 아늑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효석의 작은 방 한 면은 침대로 꽉 찬다. 오크색 침대(매트리스 구림) 위에는 남색 이불이 덮여있다. 눈 여겨 볼 점은 침대 머리맡(물건 수납 가능)에 플레이모빌이 줄줄이 있다는 것이다. 플레이모빌은 약간 큰 레고 같은 거다. 플레이모빌 말고도 인형이랑 피규어가 많은데 아무튼 메인은 플레이모빌이다. 본가에 가면 더 있다. 전세 집에는 최정예 플레이모빌만 모셔 왔다.


넓적한 등을 구부정하게 접어 플레이모빌을 조립하는 효석의 뒷모습은 흡사 발톱 깎는 곰 같다.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사람인지 그 등만 봐도 알 수 있다.




플레이모빌은 캐릭터가 봉지 안에 랜덤으로 들어있다. 효석은 몇 십 분씩 그 봉지를 조물딱조물딱 거리며 안에 원하는 캐릭터가 있는지 감별한다.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손 끝에 감각을 집중하는 효석을 보고 있으면 '저것도 하나의 취미생활'이라는 생각과 '동생 새끼 넘모 한심해!'라는 생각이 교차한다.


그렇게 엄선해 온 플레이모빌로 효석은 본인이 원하는 마을을 머리 맡에 만든다. 해맑은 아이스크림 아저씨 옆에 잠수부가 있고 그 옆에 케밥 아저씨가 있고 그 옆에 신문 배달 소년이 있는 지 좋아하는 것들의 나열인 세상이다.




효석의 방에서 또 눈에 띄는 건 침대 옆의 작은 종이 상자다. 여기엔 책 몇 권이 꽂혀 있다. 우리는 그 상자를 '지적 허영의 책장'이라고 부른다. 


효석은 옛날부터 지적 허영이 대단했다. 나무위키에서 뭐의 유래, 뭐의 역사, 뭐의 숨겨진 이야기 이런 거를 읽어 뒀다가 기회만 되면 신나게 입을 턴다. 또래보다 15세 정도 더 들어 보이는(정말로) 얼굴로 그런 얘길 지껄이면 다들 대단히 수긍하곤 한다. 




종이 책장도 다분히 지적 허영을 충족시킬 용도로 만들어졌다. 우리 집엔 거실에 큰 책장이 있어서 거기에 책을 꽂아 두면 되는데 굳이 지 방에 책을 놓겠다고 종이 책장을 만들었다.


 "아 이건 내가 이런 책을 읽는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하는 상징이지. 그니까 이 상자의 이름은 지적 허영의 책장이야" 


본인이 스스로의 허영심을 너무 잘 알아서 좀 웃겼다. 


지적 허영의 책장에는 <오발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한국, 남자>,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아가미> 등 본인의 취향과 그럴싸함을 드러내 줄 수 있는 책을 채워 놓았다. 태반이 안 읽은 책이다. 읽지 않아도 마음이 부르니 가성비가 갑인 마음의 양식이다.




회색 옷장에는 이런저런 엽서와 그림을 마스킹 테이프로 붙여 놨다. 창문 옆에는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두었다. 효석의 방에 그가 좋아하지 않거나 그에게 쓸모 없는 건 없다. 그렇게 완성된 방은 누가 봐도 효석의 방이다. 효석은 자신의 취향과 정성이 들어간 방을 굉장히 뿌듯해 한다. 가끔 자기 방 사진을 찍고 "내 방 너무 좋아.. 귀여워..." 하는데 조금 제정신인지 잘 모르겠다. 심지어 회사에서 방 사진을 여자친구 사진 보듯 꺼내 보기도 한다.




효석의 '방'에 대한 생각은 나와 상당히 다르다. 나는 방을 몸을 뉘이는 정도의 실용적인 용도로 생각한다. 꾸미기나 인테리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좆 같은 체리 몰딩이나 꽃 무늬 벽지만 아니면 된다.


효석에게 방은 뭐랄까 회복실의 느낌이다. 효석은 방에서 바깥과 단절되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 쌓인 채 에너지와 자존감 등을 회복한다. 사실 회복이라고 해봤자 맥주 마시면서 넷플릭스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보는 것 밖에 없지만 아무튼 그런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효석에겐 꼭 필요하다.




나보다 효석이 방에 더 애정을 쏟는 이유는 효석이 나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효석은 내 지인 중 최고의 개인주의자다. 어릴 때부터 축구나 농구처럼 같이 하는 건 다 못 했다. 대신 혼자 하는 달리기는 잘 했다. 오프라인 말고 온라인에서도 효석은 팀을 이루어 하는 게임에선 좆밥이다. 메이플스토리(고인물)나 듀랑고(고인물22)처럼 혼자 하는 게임만 잘 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은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여자친구랑만 논다. 효석은 개인으로 생활하면서 또래 남자 무리들과는 다른 고유한 취향과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개인으로 살기는 너무 어렵다. 12년 동안은 4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한 군데에서 하루 8시간을 같이 지내는 극단적 무리 생활을 해야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1년에 한 번씩은 반을 바꿔주던 그 마저도 안 해주고 백날천날 같은 놈들이랑 일 해야 한다. 정말 싫은 사람들과 끝나지 않는 팀플을 하는 기분. 때문에 개인주의자 효석은 언제나 군중 속에서 고독했다. 특히 회사에 다니면서 효석은 단체 생활의 어려움을 자주 토로했다.


 "아니... 왜 화요일마다 다른 직급 사람이랑 밥을 먹어야 되냐고.. 웅? '직원들의 가족 같은 생활을 위해서~^^' 요지랄 하면서 같이 밥 먹게 하면 가족이 되냐고.. 내 가족 집에 따로 있는데 시발... 그리고 '부서장님과의 저녁식사~ 강요는 아님~^^' 하면 누가 아 그럼 저는 걍 집에 가겠슴다 하냐고... 웅? 그리고 저녁식사를 왜 새벽 두 시까지 하냐고.. 그리고 다음 날에 또 술 먹자고 하는 건 뭐야 진짜 전부 역류성 식도염으로 뒈지고 싶나..."


효석은 하루 종일 공동체 속에 있다 집에 오면 지랄 보따리를 터트린다. 그는 본능적으로 모든 얘길 웃기게 하기 때문에 나는 슬프고 웃겨하며 듣는다. 효석은 다 쏟아낸 후 플레이모빌과 책이 가득한 방에 처박혀 회복의 시간을 갖는다. 방이 없었다면 효석은 지금보다 성격이 좀 더 나쁘고 욕을 좀 더 많이 하고 퇴사를 좀 더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효석뿐 아니라 다들 조금씩 개인주의자임으로 각자에게 맞는 '방'이 필요하다. 이 '방'은 꼭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어도 된다. 나처럼 블로그를 '방'으로 삼을 수도 있다. 나는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하루 동안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정리한다. 생각이 모여 글로 써지면 나는 그 글만큼 내가 형성(?)된다고 느낀다. '방' 밖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면, '방' 안에선 스스로를 만들어 낸다. 


효석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나를 표현하는 것들로 채워진 공간도 좋다. 최상의 상태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이라든지 빔프로젝트로 영화를 볼 수 있는방, 최애의 굳즈로 가득한 방, 벽면 한 쪽이 책으로 가득 채워진 방, 내 일상 사진을 수집한 블로그, 일기를 쓰는 다이어리 등등. 나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다.


'방'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길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방'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든든한 마음이 된다.




효석과 나는 퇴근 후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각자 내일의 퇴사를 막을 만한 에너지를 채운다. 효석과 나는 함께 빚을 갚는 운명공동체지만 집에서 만큼은 서로가 개인으로써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한다. 왜냐하면 한 명이 빡쳐서 퇴사를 하면 남은 한 명이 굉장히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공동체이면서 개인일 수 있는 이 관계가 나는 아주 흐뭇하다.




+ 전세로그 06. 05                                              

효석의 플레이모빌 중 극히 일부다. 저기 역기 든 플레이모빌은 귀한 거라고 뜯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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