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마리는 친구가 없을 뿐 아니라 샹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친구 중 가장 고학력자는 대학 동기 김마리다. 마리는 나와 함께 광고홍보학을 전공하며 우울한 미래를 그리다 저 혼자 새 인생 살겠다고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무슨 짓을 하려고 광고홍보에 정치외교까지 배운 걸까. 학사의 머리로는 도저히 석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며칠 전엔 마리가 대뜸 사주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보라는 곳에서 석사씩이나 한 사람이 사주에 운명을 맡기려 하냐, 조국의 미래가 정말이지 어둡다 어쩌구 하며 갖은 비아냥을 했다. 하지만 나는 고학력자의 말을 잘 듣는 편이기 때문에 결국 같이 사주를 보러 갔다.
나는 사주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내 상상 속에선 최소 40년 된 건물에서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의 할아버지가 "어디 보자..."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며 한자가 빽빽한 책을 넘기며 붓글씨도 써가며 사주를 봐줄 것 같았다. 편견에 가득찬 나는 종종 통수를 쎄게 맞는다. 요즘엔 앱이 잘 나와 있어서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사주가 바로 뜬다고, 이름 마저도 세련된 '김태희' 원장님이 말씀해주셨다.
"아.. 세상이 좋아졌네요..."
"그럼! 어디 책 같은 거 넘기면서 봐줄 줄 알았어?"
예...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반성하며 김마리의 사주 풀이를 들었다.
"스흡... 여기 봐, 사주에 1이 많지? 1이 많은 사람은 뭐든지 지가 다 해야 돼. 자기주도적이지. 좀 나쁘게 말하면 독단적이고. 남들이 보면 '어머~ 쟤는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이야?' 싶을 거야"
와.. 와 소름 돋아. 마리와 나는 세상에.. 맞아맞아... 니가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 팔자였네.. 하는 추임새를 넣어 가며 열심히 들었다. 사주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했다.
마리는 정말로 사서 고생하기를 좋아한다. 좋아한다기 보다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미래의 자신에게 터무니 없이 많은 일을 주고 만다. 대학원에 들어가는 짓거리만 봐도 알 수 있다.
마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사방팔방 벌여 놓곤 연신 "아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를 반복했다. 무슨 학회에 무슨 스터디에 무슨 전람회에 무슨 시험에... 귀찮아서 동아리 하나도 안 들었던 나로선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경외롭게도 마리는 언제나 학점 4점 이상에 연애까지 해냈다(무려 연애까지!). 그녀가 성실하고 똘똘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 놀라웠다. 마리는 약속과 수업에 빈번히 늦고, 맥북을 신데렐라 구두처럼 흘리고 다니고, 마감에 허덕이다 줄곧 넘기기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해내는 건 기이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마리는 똑똑한 멍청이, 게으른 성실이, 칠칠맞은 똑똑이었다. 세 마디구나. 아무튼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해하길 관두고 그냥 '그런 종족'이 있나보다 생각하게 됐다.
마리는 본인의 사서 고생에 굳이 지인들을 끌어들였다. 때문에 마리의 몇 없는 친구인 나는 그녀가 벌인 일에 가담하느라 꽤나 고달팠다.
잠시 마리에게 얼마나 친구가 없는지 말하자면,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여느 때처럼 나대던 마리는 발을 헛디뎌 발가락이 부러졌다. 너무 아팠으나 부러진 줄은 모르고 그냥 집에 갔다. 그 날 새벽, 치킨이 순살 되듯 뼈가 발리는 고통에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걸을 수가 없었다. 마리는 별로 고심하지도 않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빵떡아"
"(새벽이라 자던 중이었다)... 왜.."
"우리 집으로 좀 와줘라"
"...왜.."
"나 발가락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야 되는데 걸을 수가 없어"
"...왜.."
"어제 넘어져서 발가락이 접질렸는데 아무래도 부러진 거 같아"
"..저런... 근데 내가 너네 집에 왜 가..?"
"나를 업고 병원에 좀 데려 가 주면 안 될까?"
당시에 나는 경기도 시흥에 살았고 마리는 학교 근처인 서울 상도동에 살았다. 그래서 내가 마리네 집까지 가려면 두 시간은 걸렸다.
"이 새벽에..? 나는.. 나는 멀리 살잖아... 자취하는 애들 중에 부를 사람 없어?"
"응 없고 니가 지금 출발하면 병원 문 여는 시간에 우리 집에 딱 도착할 수 있어. 또 니가 한가하기도 하고"
나는 뭔가 반박하고 싶은데 묘하게 다 맞는 말이어서 그렇지.. 그러네...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맞는 말하고 지랄이야...' 생각하며 지하철을 타고 마리에게 갔다. 마리는 부탁도 당당하게 해서 들어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다.
도착해 보니 마리는 안 감은 머리를 곱게 묶고 옷까지 싹 입고 있었다. 내가 업기만 하면 되겠구나. 때는 8월의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마리가 아무리 50kg 미만의 가벼운 여성이었다고 해도 골격근량이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내가 들기엔 너무 덥고 힘겨웠다. 그에 비해 마리는 남의 등에 업히는 건 처음이라며 발랄하게 꺄르르 거렸다. 마리의 반대쪽 발가락도 부셔 데칼코마니를 만들까 싶었다. 이로써 마리는 친구가 없을 뿐 아니라 샹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는 이런저런 경조사 및 행사, 노동에 나를 동참시켰다. 페스티벌이라든지 템플스테이, 여행, 명사 특강... 여덟 시간짜리 명사 특강은 너무 지겨워 마리 얼굴에 토하는 줄 알았다.
마리의 주도 하에 글쓰기 모임을 하기도 했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기도 했다. 나는 '다음엔 니가 똥이 마려우면 똥을 싸라 해도 안 쌀 거다'라고 다짐 했지만 정신 차려보면 마리와 함께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여러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리를 따랐던(?) 이유는 '니가 좋은 거라면 진짜 좋은 거겠지'라는 생각에서였다. 매사 잘 해내는 니가 하자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마리가 하자는 건 자세히 묻지도 않고 한다고 했다. 또 나는 내 의지로 하는 일이 없어 한가하기도 했다. 마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 나이에 또래들이 하는 것들을 많이 놓쳤을 것이다.
마리의 사서 고생은 일뿐만이 아니라 관계에도 적용된다. 마리는 누가 들어도 화 날 말을 해서 사서 갈등을 조장하곤 한다. 예컨데 나의 남자친구와 마리의 남자친구는 모두 여자친구가 늦지 않게 집에 들어가길 원한다. 나와 마리는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불만스러웠다. 세상이 흉흉하니 걱정이 돼 그런 줄은 알면서도, 내가 뭘 잘못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조심해야 하고 내가 자유롭지 못 한 게 빡쳤다.
이 때 나는 괜히 싸우기 싫어서 적당히 "알겠어 들어갈게~ 금방 갈 거야~"라고 말하는 편이다. 하지만 마리는 굳이 굳이 "나는 늦게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가는 거야. 나도 나쁜 놈들이 많아서 무섭지만 그렇다고 내가 집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맙소사 내 친구 너무 멋있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너도 참 앵간히 해라, 사서 싸움을 만드냐"하는 소리를 하게 된다. 마리 년은 친구한테도 절대 져주는 법이 없어서
"내가 그렇게 하는 건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하고 참새처럼 오종종 쏘아 붙인다. 그래.. 어련하겠니...
나는 상황에 질 때가 많다. 다수의 의견이 이러하거나, 내가 저러하다고 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것 같을 때 나도 대강 이러하다고 동조한다. 그래서 내 의견은 상황에 맞춰 자주 수정된다. 하지만 마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웬만하면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그녀는 의견마저 지킬 수 없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리는 자신의 의견을 고수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킨다.
"근데 나도...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존심만 부릴 때가 있어"
나는 마리와 가까운 친구인 특권으로 이런 고민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녀도 소신과 고집, 자의식과 자존감, 균형과 타협 사이에서 항상 고민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사주를 다 보고(김태희 원장님은 마리는 올해 취업이 안 된다고 했고, 나는 3년간 의욕이 없을 거라고 했다) 마라탕을 먹으러 건대 뒤쪽으로 갔다. 길 양옆으로 양꼬치 집과 마라탕 집이 늘어선 와일드한 분위기의 거리였다. 우리는 마라탕과 마라샹궈를 시켰다.
우리는 건두부를 골라 먹으며 마리의 인턴 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마리는 지금 신문사 데스크에서 인턴을 하면서 기자를 준비하고 있다. 마리는 기자 준비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턴을 한다는 소식을 전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사 입사 시험을 봤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토록 빠른 전개는 뭔가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시작하는 그녀의 '사서 고생'의 일부다. 나는 사실 뒷일 생각 안 하고 일단 시작하는 마리의 대책 없음을 좋아한다. 물론 본인은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과거의 자신을 욕하고 현재의 게으름을 저주하지만,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해내는 모습은 내 눈엔 거의 감동적으로 비친다.
마리가 이토록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마리의 이 일관된 목표는 7년 째 변함이 없다. 꿈 없이도 살 수 있으면 어른이라는 요즘에 마리의 목표는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구석이 있다. 또 마냥 이상적인 느낌도 있다. 그래도 그 이상을 구체적인 삶으로 구현해내는 마리를 보면 꿈 같은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도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코인노래방에 갔다. 마리는 자주 부르는 서문탁의 '사미인곡'을 불렀다. 사는도다, 어이할꼬, 가자스라 등 조선시대 시조틱한 가사가 특징인 노래다.
"만백성에게 고하노니~ 사랑하며 살지어다아~"
마리는 특유의 비음 섞인 하이톤으로 원키를 힘겹게 소화했다. 노래를 부르는 마리를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세일러문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볼 때 느꼈던 울렁거림이 되살아났다. 마리라면 고생스러운 이 순간도 서문탁의 우렁차고 쨍한 보이스에 몸을 맡기며, 사미인곡 가사처럼 '사랑하며 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대로그 06.11
왼쪽은 마라샹궈, 오른쪽은 마라탕. 다음엔 중국당면이랑 건두부랑 청경채만 가득 담아서 먹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