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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Jun 18. 2019

[글로그 19] 제주도 사람들의 먹고 살기

"저 사람은 프로다" "정말로"

6월 초에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엄마랑 동생이랑 2박 3일로 갔다. 작년 3월에도 셋이 엄마 퇴직금을 털어 제주도에 갔었다. 그 때 엄마가 재미를 좀 봤는지 올해도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아빠는 할머니의 충실한 보필러로 집에 남겨 두고 가기로 했다. 효도는 각자 셀프로 하시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 가지를 다짐했다.

'반드시 여행기를 쓰겠다'

이번 여행에서는 제주도의 바다나 바람, 숲 같은 걸 소재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 하는 동안에도 글로 쓸 만한 심상을 떠올리려 애썼다. 쇠소깍에 가서도, 우도봉에 올라서도, 수국을 보면서도 서정적인 이미지에 집중해 보려 했다. 바다 너머 불어오는 찬 기운이나 수국의 색감을 그 어떤 김훈 같은 표현... 그 어떤 김영하 같은 감수성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는.. 매우... 매우 오졌고.. 아니 그 뭐지... 쉬를 지리게 했고... 아니.. 하...'

오지고 지리는 표현 외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글로 써봤다.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바다는 아직 검푸릏다. 몇 번의 바람이 흘러 빛이 섞여들어야 바다는 낮의 애매랄드 색으로 변한다.

제주 바다를 건너온 바람은 찬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오금이 저릴 듯 맑은...



'...검푸릏다.. 릏... 저렇게 쓰는 게 맞는 건가.. 릏....

전체적으로 감정이 좀 투 머치하네... 개느끼하구...

맞춤법도 에메랄드지 애매랄드는 또 뭐야 존나 애매하게...

오금은 왜 저리지.. 이 새끼(?) 쉬 마려울 때 썼네...'



내겐 아무래도 아름다운 자연을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이 없었다. 그냥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 맛있었고 오션뷰 멋졌고 만장굴 신기했고 해물라면 비쌌다.

그런 단편적인 감상 후에는 꼭 '여기는 평일엔 장사가 되나...' '가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셨나보네' '비 오는 날엔 손님이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제주도 사람들 먹고 사는 걱정이 따랐다.

"여기는 이렇게 외진 데 있어서 사람들이 안 오지 않을까"

"다 검색해서 찾아 오지"

"그래도 바닷가 쪽은 장사가 저렇게 잘 되는데 여기는 손님이 없잖아"

"...있잖아"

"웅"

"그래도 이 사람들이 너보다 잘 벌어.."

"웅.."

"니가 젤 좆밥이니까.. 남 걱정 그만해"

"웅..."



내 먹고 살 걱정에서 벗어나려고 여행을 왔으면서 왜 남 먹고 사는 걱정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너무 근본까지 노동자가 돼놔서 남들 일 할 때 노는 게 맘이 편치 않은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어딜 가든 걱정을 멈출 수 없어 거의 괴로울 지경이 되었다.

나는 제주도 바람이고 풍경이고 어차피 써지지도 않는 거 집어 치우고, 제주도의 노동 피플에 대해 쓰기로 했다.









1. 프로페셔널 말 아저씨

제주도는 조금만 넓고 푸른 곳이면 승마 체험장이 꼭 있다. 한 삼만 원씩 받고 20분 정도 말을 태워 준다. 우도봉 초입에도 승마체험장이 있었다. 여러 승마체험장 중에서도 우도봉이 기억에 남는 건 말을 태워주시는 분(편의상 말 아저씨)이 대단한 프로셨기 때문이다. 보통 승마체험은 말을 타고 풀밭을 거니는 수준이다. 체험자가 말에 타고, 인솔해 주시는 분이 옆에서 말 고삐를 잡고 걷는다. 하지만 우도봉의 말 아저씨는 달랐다.

아저씨는 손님을 말에 태우고 본인은 다른 말에 탔다. 그리고 두 말을 끈으로 이었다.

"저러고 달리는 걸까"

"설마..."

설마 달렸다. 두 말은 아저씨의 통솔에 따라 우도봉 일대를 유려하게 달렸다. 서로를 밀어내는 자기장이 있는 듯 부딪히지도 않았다.

"저 사람은 프로다"

"정말로"

우리는 조금 감탄해서 수근거렸다. 하지만 곧 수근거림도 멈추고 입을 딱 벌렸다.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뒤 따라 오는 손님의 영상을 찍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 아저씨는 거의 뒤 돌아 탄다 할 정도로 허리를 100도 정도 꺾고 타셨다. 이 와중에 손님도 아저씨 못지 않은 프로여서 얼굴에 엉기는 머리카락을 쉼 없이 넘기며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땅콩 아이스크림을 빨며 프로 대 프로의 치열한 승마 체험을 관망했다. 손님과 말 아저씨는 우도봉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 아저씨의 프로 정신을 칭찬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은 타고 싶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람뿐 아니라 말들조차 너무 얌전하고 프로페셔널 했기 때문이다. 약 여섯 마리의 말들은 앉지도 않고 풀도 안 뜯고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완벽하게 일렬로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연하다기 보다 왠지 불쌍해 보였다.

게다가 어린 말 한 마리는 입구 쪽에 묶여서 인형처럼 서있었다. 아무래도 모객을 위해 말 아저씨가 그곳에 둔 것 같았다. 어린 말의 긴 속눈썹과 큰 눈이 처연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말들이 이리저리 뒹굴거렸다면 한 번 타볼까 싶었을 텐데, 이건 마치 말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유쾌하지가 않았다. 날이 더워지면 말들은 한 층 더 짠해 보일 게 분명했다.

나는 이 사실을 말 아저씨한테 얘기해 주고 싶었다. "아저씨 이건 마케팅에 조금도 도움이 안 돼요! 어서 그늘막을 쳐주시고요, 말들을 좀 풀어주세요!" 아무튼 아저씨도 말들을 세워 두느라 고단할 테니까. 이리 하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말아저씨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셨다.



2. 우도 유재석

우도에는 주요 관광지를 도는 순환 버스가 있다. 하우목동 포구에서 출발해 비양도, 검멀레해변, 하고수동 해수욕장, 땅콩마을 등을 쭉 돈다. 버스는 몇 분에 한 대씩 있고, 표는 한 번만 끊으면 계속 탈 수 있다. 바이크나 전기차도 빌릴 수 있는데 마땅히 관광지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버스를 이용하길 추천한다. 이렇게 쓰니 몬가 여행 블로거 같은데... 아무튼 그렇다. 표는 성인 한 사람 당 오천 원이다.



버스 기사님들은 관광지가 가까워지면 관광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신다.

"여러분 검멀레 해변이 왜 검멀레 해변인지 아세요? (이 때 적당히 "몰라요~"라고 해야 한다) 모래가 죄다 꺼먼 색이라서 검멀레 해변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니까 검은 모래 해변인 거죠. 여기서 모래 퍼 가면 안 돼요오~ 불법이에요~ 아시겠죠~?"

평소엔 콧바람으로 "ㅎ.." 정도 웃는 리액션에 그치는데, 이번엔 왠지 호탕하게 웃었다. 여행지에선 뭐든 좀 후해진다.



검멀레 해변에서 존나 비싼 톳 짜장면이랑 해물짬뽕을 먹고 다시 버스에 탔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에 부릉부릉 가까워지자 기사님이 소개를 해주셨다.

"안녕하쎄요오~~ 여러분은 우도 유재석! 우우도 유재석(강조)이 드rㅏ이vㅣㅇ 하는 버스를 타고 계십니다~"

?.. 기사님의 텐션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가는 곳은 하고수동 해수욕장인데요, 여기가 바로 우도의 강남입니다. 왠 줄 아세요? (승객: 왜요오~?) 캬 여억~씨 궁금하실 줄 알았어요. 여기가 우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기 때문입니다. (승객: 아아~) 그쵸? 이해가 딱! 딱! 되시죠? 제 친구 중에 맨날 자기가 그지라고 하는 놈이 있는데, 하루는 이러는 거에요. '아 나는 제대로 된 직업도 없고 그저 이 하고수동에 땅 이천 평 있는 게 다다~ 땅뙤기 그거 지가 해봤자 한 오십억 밖에 더하니? 나는 증말 그지다 그지야, 얘 너는 버스기사 해서 월급도 착착 들어오구 좋겠다 얘' (승객: 웃음) 그러는 거 있죠? 아우 버스 하기 싫어~"

우도 유재석은 승객들이 한 바탕 웃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장전했다.



"어제는 날이 흐려서 내가 '오늘은 바다가 별루 안 이쁘네요~' 했더니 어떤 언니가 '왜요오 이렇게 예쁜데?" 하는 거야 아니 저게 뭐가 이뻐? 동네에 하나씩 다 있는 하천이지 뭐. 다들 집앞에 이런 해변 하나씩 있는 거 아닌가 그죠? (승객: 아니요~~) 어머 없어? 아휴 안쓰러워라.. (승객: 웃음) 나는 그래도 육지가 좋더라. 여기는 뭐 문화생활 할 게 없어. 저번에 어벤져스 보다가 배 끊겨서 1박2일 할 뻔했쟈나. 증말 우도 지긋지긋해. 아우 버스 하기 싫어~ (승객: 웃음)"



버스 하기 싫다는 푸념으로 끝나는 일관성까지 완벽했다. 이 1인 구전 설화는 너무 많이 해서 달달 외움은 물론이고 변주와 각색까지 됐을 게 분명하다. 근데 정말로 설화와 닮은 것이, 이 스토리텔링 속에는 섬 버스 기사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한의 정서를 해학과 풍자로 승화한 민족의 후손 다웠다.

나는 슬픈 얘기를 웃기게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설움을 희화화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인생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인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우도 유재석이 마음에 들어 좀 더 버스에 있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수작 부리지 말라고 하여 내렸다. 아우 걷기 싫어~



3. 월정리 브레멘 음악대

"제주도에 왔으니 흑돼지를 먹자"해서 월정리 해변가에 있는 흑돼지 집에 갔다. 사실 흑돼지가 맛이 있느냐 하면, 물론 맛있다. 하지만 가격만큼 맛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확실히 가격과 맛이 정비례하진 않았다. 그 돈으로 삼겹살을 양껏 먹었다면 더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제주도였고 제주도에서 흑돼지를 안 먹는 건 좀 찝찝하니까. 교촌치킨을 먹을 때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먹었다.

한 점 한 점 손을 벌벌 떨며 쌈을 싸는데 도로 맞은편으로 어떤 '무리'가 지나갔다. '모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 무리는 1 인간, 1 당나귀, 1 개, 1 고양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치 브레멘 음악대처럼 당나귀 위에 강아지와 고양이가 올라 타 있었다. 이제 어디서 닭 한 마리만 구해 오시면 될 것 같았다.



"저건 분명 뭔가 광고하는 거다"

효석 아무 이유 없이 저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동의했다. 우리는 밀레니얼 세대 답게 인스타그램에 '#월정리당나귀'를 검색했다. 그러자 우리가 본 브레멘 음악대의 사진이 떴다. 역시. 그 사람은 알바고, 정기적으로 월정리 일대를 돌며 모객을 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이 근방에 당나귀 목장이 있다, 고양이 카페가 있다, 브레멘 음악대 극장이 있다 등의 추론을 했다. 무엇을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훌륭한 마케팅이 틀림없음에 둘 다 동의했다. 소비자가 스스로 검색하고 추측까지 하게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흑돼지를 먹고 월정리 해변가를 걸었다. 그런데 저 앞에 아까 그 브레멘 음악대가 보였다. 당나귀는 평화롭게 모래 사장에서 뒹굴거렸고 개는 그 주위를 펄쩍펄쩍 뛰었다. 알바일 거라 추측했던 사람도 모래사장에 펼쳐져(라는 표현이 어울리게) 있었다. 그의 옆에는 땅콩 막걸리 한 병이 놓여있었다.

"알바 아닌가봐.."

"그러네..."

그냥 동물을 좋아하는 인간과 그의 말을 잘 듣는 동물들이었다. 그래 세상에 뭘 파는지 모르게 광고하는 게 어딨어...

고양이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며 열심히 꾹꾹이를 했다. 자낳괴에다가 십멍청한 효석과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 얼른 자리를 떴다.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도 효석과 나는 "승무원들도 참 힘들 거야..?" "글치..." 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히 착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남 걱정을 했을까. 빨리 누구의 노동도 걱정할 필요 없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돌아가면 내 노동만 걱정하면 되겠지. 관광 노동의 도시 제주 안녕.



+ 제주로그 06. 18

월정리 브레멘 음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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