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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석 Feb 10. 2016

On my way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중간에서

저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은 나이에 비해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며, 그 경험들을 융합하여 지금은 다양한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기업을 돕는 사업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제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 안했지만, 이 자리를 빌어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려합니다.  



EARLY LIFE 


저는 서울 종로가 본적지이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경기도 수원에서 자랐습니다. 

학창시절엔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고, 학업보다는 독서를 좋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10대때의 저는 무척 조숙했던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재미도 없고 주입식으로 외우기만 하는 교육에 일찍 흥미를 잃어 수업엔 별로 관심을 갖지 못했지만 혼자 책보고 사색하며 조용히 학창시철을 보냈습니다. 아마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철학 전공으로 대학을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아 고교때는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습니다. 아마도 음악이 주는 자유분방함이 제가 원하는 삶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18살때 학교 강당에서


그때까지는 인문학자가 꿈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은 음대로 진학하게 됩니다. 대학에서는 지휘와 성악을 전공하였으나 늦게 시작한 음악이라 재능이 부족하여 실기에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때도 책 읽고 공부하고 하는 것은 좋아하여 많은 교수님들이 연주보다는 음악학이나 미학등 이론분야를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많이 하셨습니다. 학부시절엔 4년 내내 학생회 임원 및 학과대표를 하였는데, 그때의 경험이 리더십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로는 자기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재능이 있는 쪽으로 찾아야 하는게 맞는데 10대때 저는 제 멘토가 되어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게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청년들을 만나면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은 이유도 저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소질도 없는 음악을 무려 서른살까지 하게 되었지요. 더 일찍 그만두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애초에 천재가 아닌 이상 저보다 15년은 더 먼저 시작한 친구들과 경쟁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걸 왜 그때는 몰랐는지...



대학교 4학년때 찍은 졸업연주회 프로필사진


 당시 가정형편은 어려운 편이었는데, 마침 병역문제로 고민하던 그때에 육군에서 4년 전액 장학금을 주는 군장학생을 모집한다고 하여 저는 두번 고민 안하고 바로 지원해서 합격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입학할때 성적우수장학금을 받고 2학년때부터는 육군장학금을 받아서 당시 IMF로 아버지가 사업실패하시고 힘들었던 가계에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4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은 덕분에 입대나 취업에 대한 큰 고민없이 원만한 학업생활을 할 수 있었고, 학부 졸업이후 저는 육군장교(학사43기)로 임관을 하게 됩니다.  



ARMY CAREER 


제가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하나로 스스로의 동기부여를 위해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저는 음대를 다니면서 흔히 '고생 안하며' 살았다는 자책을 했습니다. 고상하게 예술을 즐기며 음악을 하는 것이 행여나 스스로를 온실 속에 가두어 이 치열한 현실에서 발전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그러면서 저는 스스로의 껍질을 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해보지 않았던 일에 새로이 도전하며 저의 한계를 넘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임관 직후 근무부대를 편성할때 대부분의 동기들은 조금이라도 더 편한 보직을 받으려고 애를 썼지만 저는 당당하게 손들고 특수부대에 가고 싶다고 지원했고 그 결과 강원도 화천에 위치한 702 특공연대에서 특수전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합니다. 


임관기념사진


제가 처음 근무했던 그 부대는 그야말로 나약했던 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과거 삼청교육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한 부대로서 훈련의 양과 강도에 있어서 손꼽히는 부대였지요. 애초에 6년의 임기동안 차분히 나 자신을 개조하자는 저의 계획은 단 1년만에 이루게 되었습니다. 고상한 음대생에서 완연한 "전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애초에 목표로 잡았던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이거니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특공부대에서 2년 정도를 근무하며 입대 전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자 이제는 그 이상의 목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저는 우연히 국방일보를 보면서 발견했습니다. 바로 육군 군악대에서 군악대장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는데, 그래도 음대를 졸업하고 제 전공을 한번 살려보지도 못하면 안될 것 같아 산속에 훈련 나가서도 악보책을 보고 지휘연습을 부랴부랴하며 오디션에 참가했습니다. 당시에 많은 전문가들이 오디션에 왔는데 사실 그들과 비교해서 저의 실력은 좋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 운이 좋아서 마지막 한 자리에 제가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동기들 중에서는 가장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어쨌든 어부지리로 그렇게 60만 육군 중에 단 60명만 있다는 군악대장. 그 중에서도 6명의 중위 군악대장 중 최연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군내에서도 화제였습니다. 음대 출신이 특수부대 장교로 입대한 것도 화제였고, 특수부대 소대장이 군악대장으로 임관한 것 역시 신기한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해서 저는 총 6년간의 군생활동안 초반 3년은 특수부대 장교로, 후반 3년은 군악대장으로 근무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저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나약한 나를 개조하자는 목표와 대학에서 배운 음악적 재능을 직업으로 하자는 목표를 모두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20대 중반의 나이로 24인조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고 운영한 경험은 지금도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Summit on my 20s



STUDY & RESEARCH EXPERIENCE


6년간의 군생활 임기를 시작하면서 저는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나약했던 모습을 깨부시고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춘 사람이 되자였고, 다른 하나는 전역 이후의 삶은 고민하고 준비하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걸 좋아했던 저의 당시 목표는 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저는 그 길이 잘 어울린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실기능력이 너무 부족하여 저는 대신 경영학을 공부하여 예술경영(Art Business)를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저는 음악도에서 사회과학도로 진로를 바꾸었고, 그 이후로 저는 군에 재직하면서 줄줄이 경영대학원, 정치대학원, 행정대학원에서 수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을때는 경영학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미지의 호기심이 저를 더욱 끌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군 생활을 하며 느꼈던 지식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어서 였는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전과목을 만점(4.5/4.5)으로 최우등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우수논문상, 성적우수상, 도서관장상 등 거의 모든 상을 다 받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애초 계획이 전역 후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비전공자가 석사 하나만 가지고 가기에는 차별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마침 그 때 좋은 기회도 있어서 이어 저는 정치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간 국제정치와 전략을 공부하였습니다. 이때도 전 과목을 만점으로 마치고 특히 학생회장까지 겸직하며 학업과 리더십 모두 큰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공부를 하자 이제 저는 완연한 사회과학도로 전환되었고, 애초엔 막연히 예술경영 정도를 공부하자던 계획도 경영전략 쪽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전역을 앞두고 추가로 행정대학원 한 곳에 더 다니기도 했는데 사실 이건 과유불급이었고, 개인적인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나 후회가 됩니다. 여튼 그렇게해서 6년간의 군생활을 마칠때 저는 3개의 대학원 학위증 및 수료증, 수많은 상장들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군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공부를 한 것을 두고 혹자는 그럼 그만큼 본업은 소홀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물론 그래선 안되지요. 그래서 저는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후에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보통은 군에서 일년에 하나 받기도 어렵다는 장관급 지휘관 표창 및 지방자치단체장 표창을 저는 마지막 4년 동안 총 16개를 받았습니다.이것은 제가 그런 우려를 하시는 분들에게 항상 반론의 근거로 제시드리는 객관적 자료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구능력도 인정받아 마지막해에는 군악대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방대학교 정신전력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위촉되어 육군 장병정신전력 측정에 관련한 통계논문도 하나 발표하였습니다. 이렇게 본업과 연구 양쪽에서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고 저는 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군에서 전역하였습니다. 이때가 제 나이 서른살이었습니다.  



TRAVEL THE WORLD 


" “와아-“. 내 20대의 마지막 겨울, 나보다 스무살 이상은 많은 대학원 동기들과의 모임에서 나의 당돌한 인사말은 모두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의 20대를 마무리하는 이 자리에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봤을 때, 나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하고, 다시 1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이렇게 다시 살 자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난 열심히 살았다”는 다소 건방진 자신감에 넘치는 말을 감히 하였다.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세상을 모두 가질 것만 같았던 패기와 자신감, 그리고 주변의 넘치는 격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기였다. 나는 10대때 꾸었던 장래희망을 이미 20대 중반의 나이에 실현한 상태였고, 많은 학교 기관에서 최우수로 학업을 마쳤고, 매우 우수한 성과를 내고 6년간의 직장생활을 막 마치고 그 누구보다 화려하다고 자부하는 이력과 경력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 나의 자취는 스스로에게 무척이나 실망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제일 처음 나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 명문대의 어느 세계적인 석학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기도 하였으나 스스로의 결심으로 막판에 유학을 포기하였다. 뒤이어 이직을 결심하고 취업시장에 나가보았지만 기업과 나의 기대치가 서로 맞지 않아 오랜 방황 끝에 구직활동도 포기하였다. 이 후 나는 사업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나는 너무 가진 것이 부족했고 사회의 벽은 녹록치 않았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시간은 내가 퇴직을 한지 1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보냄을 자랑스럽게 여긴 20대를 마치고 내가 준비하던 모든 일을 연달아 실패하며 백수로 지낸 시간이 자그마치 1년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 어떤 외부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던 나에게 내면의 고통은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나 자신을 무너뜨리는 늪과도 같았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인생에서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 운명처럼 찾아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 <세계일주를 꿈꾸는 당신에게>, 서문 중


정말 거짓말 처럼 서른살에 사회에 나와 제가 했던 일들은 모두 보란듯이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던 유학도 실패하고 이후 취업도, 사업도 실패했습니다. 좌절속에 갇혀 지내다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심을 내렸습니다. 한 살이라도 더 늦기 전에 더 넓은 세상을 보자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얼마 되지 않은 여비를 만들고 그 길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동유럽, 서유럽을 다 돌고 미국을 지나, 지구 북반구를 한바퀴 도는 세계일주를 해냈습니다.  총 36개국 45개 도시를 방문한 이 여행은 숫자뿐만 아니라 그 여행의 질에 있어서도 제 인생을 바꿀만한 것이었습니다.

여행을 통해 저는 제 자신이 이 넓은 세상에서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경험은 저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LEARNING CALLED FAILURE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 크게 성장하는 걸 느낀 저는 여행 이후에는 얼마나 더 성장할까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온 저는 또다시 줄줄이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게 됩니다. 기세 등등하게 전역 한 이후 줄줄이 한 실패를 극복하고자 떠난 여행인데, 그렇게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니 또 하는 일마다 안되서 저는 또 방황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여행에서 귀국을 한 동기는 평소 나를 좋게 보아주시던 한 정치인께서 총선에 출마하시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선거캠프에서 그 분의 수행보좌역으로 일을 하게 되어서 입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1위까지 올려놓았지만 당의 불공정 공천으로 낙천되었고 저는 졸지에 다시 실업자가 되었지요. 그 이후 한 보험회사에 입사를 하기도 하였으나 회사는 제 인맥만 뺏어가고 상처만 주어 한 달만에 바로 그만두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한 외국계 가전회사에 취업하기도 하여 한 6개월 정도 근무하였으나 이곳도 경영악화를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일하는 곳마다 안되자 저는 창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창업한 일은 무역업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일주를 하면서 알게된 친구들과 아이템들을 통해 저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때까지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할 정도로 어리석은 의사결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때의 빚을 갚고 있고 아직까지도 재고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으로는 재고부담이 없는 지식서비스업을 하자 결심하고 출판기획업을 하였습니다. 이 일은 다행히 크게 위험한 일이 아니라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업무에 비해서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라 부업으로는 적당했지만 전업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글쓰기 강사, 비밀리에 했던 커피숍 알바, 일용직 등 많은 일들을 하며 삶과 투쟁하듯 살았습니다.



ANOTHER CAREER AS A TRAVEL EXPERT

여행을 하는 동안 저는 여행의 경험을 SNS에 실시간으로 연재하였고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그 글을 정리해서 다시 한번 연재 했는데 그때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내용을 책으로 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두 번 탈고한 원고를 또 두 번 더 탈고하여 2013년 12월 <세계일주를 꿈꾸는 당신에게>라는 저의 첫 책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작가가 자기 책이 소중하지 않겠느냐만은, 저 역시 이 책을 내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베스트 셀러보다는 스터디 셀러가 되고자 했고 "세계일주를 꿈꾸는 사람의 책장이라면, 반드시 꽂혀있어야 할 필독서"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 고치고 노력하여 산고 끝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나온 책이어서 그런지 평도 좋았고, 특별한 마케팅 없이도 기대 이상의 평을 받았습니다. 이후 여행작가, 여행강사는 제 경력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고 지금도 세계일주를 꿈꾸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전을 드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STARTING BUSINESS CAREER


Keystone Management to Business School

 아이러니 하게도 그 후로 지금까지 제가 비즈니스 전문가로 일하게 된 계기는 바로 앞에 말씀드린 여러 창업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컨설턴트처럼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하지 말아야 나처럼 실패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처럼 경험이 없는 청년 창업자들을 자문하기 위해 저는 2013년 <키스톤 매니지먼트>라는 스타트업 컨설팅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당시 유능한 컨설턴트이자 Co-founder인 이경선 이사(現WillLab대표)와 함께 정말 열심히 뛰었고 그 결과 짧은 시간안에 스타트업계에서는 활동보폭을 빠르게 넓혀갈 수 있었습니다. 

 주로 하던 일은 스타트업의 가장 큰 고민인 자금조달 컨설팅, 전략 컨설팅, 마케팅 컨설팅을 하였고, 2013년 5월에는 고객사들을 모아서 광화문 드림엔터에서 투자설명회 행사를 여는 등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컨설팅 업계의 전반적인 침체에 저희는 추가적인 사업 다각화를 검토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비즈니스 전문 교육기관인 <키스톤 비즈니스 스쿨(Keystone Business School)> 입니다. 사실 컨설팅이나 교육이나 자문(Advisory)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대상이 B2B이냐 B2C이냐에 따라 다를 뿐 목적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가의 기업 컨설팅을 경험할 기회가 없는 실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전문 비즈니스 강의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로 런칭을 하였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신도림 디큐브 아카데미에 있는 캠퍼스에서 강의를 지속하였으며, 개인적으로 강사로서의 커리어도 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획과 창업 전문강사로서의 커리어


"내가 강의 활동을 많이 해서 강의 경력도 오래 됐을거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내가 디큐브아카데미에서 키스톤비즈니스스쿨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강의를 개설한 것이 작년 7월이니 이제야 꼭 1년이 되었다.


내가 강의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강의를 불러주지 않아서였다. 당시 컨설팅업만으로는 수익이 안정적이지 않아 나는 저녁 및 주말을 활용해서 강의를 하고 싶어했다.


기업강의는 그들이 원하는 강사 모델이 따로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델의 강사가 아니었다. 좋은 직장 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직업경력이나 강의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유머감각도 없고 성공스토리도 없다. 그러다보니 불러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강의시장에서 B2C는 마이너리그이고 실제 돈을 버는건 기업강의(B2B)라는 점은 공식이다.


하지만 나는 내 실력 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비록 교육담당자들에게 어필할 프로필은 아니지만 내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는 가치있는 교육을 전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맨 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


어렵사리 디큐브아카데미의 민경환 대표님과 김정숙 실장님이 과목을 개설해주셨다. 첫 달 런칭한 6개의 과목중 5개가 모객미달로 폐강하고 가까스로 한 과목으로 시작했다. 생산성 본부에서 60만원 정도에 하는 강의와 같은 커리큘럼을 회당 3만원에 진행했다. 내용은 내가 더 낫다고 자부하며 수업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하는 동안 여전히 나를 찾는 기업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모객해서 진행하는 강좌들은 늘어났다. 전업강사들도 대부분 초청강의가 주를 이룬다. 모객과 홍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의와 또 다른 영역이다. 여튼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면서, 2015년에 들어오니 궤도에 올랐다.


전업강사가 아님에도, 기업강연이 없었음에도, 직접 모집해서 하는 강의가 월 평균 20건 가까이 되었다. 교육업체에서는 그게 오히려 기업강연 스무 건 나가는것 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강의를 여는 족족 매진이었다. 오후 여섯 시까지 회사업무를 하고 난 이후 저녁시간과 주말에만 이루어낸 성과였다. 여전히 기업에서 찾지는 않았지만 러닝미, 스탠딩피플 등의 단체에서 나를 믿어주시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여튼 그리하여 지금도 나는 기업강연은 못나가고 있지만 B2C 강연으로는 전업강사 못지않게 활발히 강의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이게 불과 일 년만에 이룬 일이다." 


강사로 처음 데뷔한 이래 약 일년만에 저는 많이 성장하여 위와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고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르칠만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과서에 있는 원론을 설명했습니다. 최효석의 말은 틀릴 수 있지만 피터 드러커가 한 말은 그래도 대부분 맞는 말이니까요. 그렇게 아카데믹하게 접근한 전략이 유효했던것 같습니다. 말장난이나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정말 사람들이 몰랐던 원리와 이론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학생때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하였던 시간은 강의뿐만 아니라 사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년만에 위에서 비싸다고 비판했던  한 달 60만원하는 강의료를 한 회에 그 이상 받는 강사가 되었으며, 창업진흥원 멘토, 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 청지엔젤클럽 총무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스타트업계에 보다 깊게 관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지금의 제 상황에서는 성장할 수 있는 한계까지 성장하였다고 생각하여 그 다음 도전을 준비했습니다.


AND THEN... 

 이제 30대 중반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채롭게 살아온 인생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냉정합니다. '전문성이 떨어진다'라거나 '한 분야의 경력이 없다'라는가 하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현업에서 저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경영전략을 바흐 푸가로 설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고, 마케팅 기획을 콘스탕탱 브랑쿠시의 조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국제적인 시야를 가졌고, 내가 속한 조직에 절대 충성할 수 있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프로라면 결과로 설명해야 겠지요? 

이제 그간 많은 실패의 경험을 발판 삼아 새로운 출발선을 막 떠났습니다. 

그간의 인생여정이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많은 결과와 활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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