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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석 Jun 20. 2018

깊고 맑은 향

2007년 12월 성탄절, 경기도 연천군 5사단 사단본부 교회에서

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 이야기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시절이다.


당시 나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5사단 열쇠부대 사단사령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직할대를 총괄하시는 참모장님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는데 어느날 나를 부르시더니 정중히 요청을 주셨다.


내용인즉슨 사단 전체에서 성탄절 성가경연대회가 열리는데 좋은 결과를 얻고 싶으시다면서 사령부 교회 성가대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당시 주말에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또 직속상관의 명이라 거절하기도 애매하여 그렇게 급작스레 성가대 지휘자로 출석을 시작했다.


요새는 캐주얼한 편곡의 성가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정통을 팠다. 호흡연습부터 발성, 발음(딕션), 레파터리 분석 및 음악이론까지 생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차근차근 훈련했다. 단원들도 매주 향상하는 기량에 즐거워 하셨다. 음악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순수 아마추어 중창단(합창단 규모도 안됐다)을 데리고 몇 달 만에 오라토리오 합창까지 연주했다.


마침내 사단 성가경연대회의 날이 왔다. 우리 사단사령부 교회 성가대는 리허설에서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서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저 우리 스스로 더 나은 연주를 해서 만족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고, 그 마음을 가지고 큰 무대에 올랐다.


군대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포상인 휴가증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대의 병사들은 자극적인 음악과 퍼포먼스를 주로 준비했다. 드럼과 전자기타는 기본이고 댄스를 하는 팀, 분장을 하고 나온 팀, 복장으로 웃음을 주는 팀 등 가지각색 이었다.


그런 소란한 분위기를 뚫고 깔끔히 다린 가운을 거친 우리 성가대가 왼손에 악보를 가지런히 들고 무대에 올랐다. 아직 전 타임까지 뛰놀던 병사들은 여전히 흥분된 상태였으나 불이 꺼지고 롱핀 조명만 비추자 이내 조용해졌다. 아니, 분위기가 싸해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게다.


거기서 우리는 정통 코랄형식으로 된 미국의 현대 성가를 불렀다. 몇십년 된 곡이지만 형식은 초기 낭만시대 스타일의 곡이었다. 찬송가처럼 4성부로 3절까지 있는 원곡을 1절은 독창, 2절은 제창, 3절은 이중창, 후렴은 합창으로 편곡해서 잔잔히 불렀다. 흔히 말하는 클라이막스에 지르는 부분도 없는 곡 이었지만 화성이 매우 아름다운 곡이었다.


내가 지휘하는 손가락을 까딱할 때마다 그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소리가 변했다. 커졌다 작아졌다, 당겼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면서 그 사이에 정확히 교차되는 화음을 만날때 스스로 전율했다. 재미없는 레파토리여서 그랬는지 결과는 공동 장려상 정도였다. 하지만 단원들 모두 매우 만족한 연주였다. 우리 이 경험을 앞으로 잊지 말자고 했다.


그러고 십몇 년이 지난 며칠전 갑자기 그 때의 그 공명이 떠올랐다. 고요한 크리스마스 저녁의 군부대 교회에서 울리던 그 아름다운 화음이.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것이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였다. 화려하거나 꾸미는 걸 싫어하지만 늘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도전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도 나만의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최선을 다했다. 눈부시게 밝진 않지만, 깊고 맑은 향이 나는 사람이 되고자했다.


조직의 운영이 재즈밴드라면 리더십은 오케스트라다.
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소리를 모아 화음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사업에서도 그리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나의 본질과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더 좋은 리더가 되고 싶어서 이듬해 나는 경영대학원에 입학했고 그게 오늘까지 왔다.


그때 그 성가대원들과 같이 호흡 연습을 하던 내가, 이제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직무 교육을 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과 나를 통해 성장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땐 상관이 시켜서 했지만 지금은 억단위 사업들도 직접 만들어서 한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신경쓸게 많기는 하다. 그래도, 그럴수록 더욱 깊고 맑은 향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어제 새벽에 명상하다가 문득 그 시절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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