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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석 Oct 10. 2022

왜 쓰는가. 나, 최효석.

나는 어려서부터 언어 능력만큼은 수재 소리를 들어봤다.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기였을 때부터 한번 들은 말은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하고 너댓살 정도 되자 배우지 않은 말도 했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유치원에서 한 송년 행사에서 사회를 맡았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A4용지로 서너 장 되는 대본을 한 줄도 안 틀리고 다 외워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남들보다 한 살이나 어린 나이였지만 선생님들도 내가 그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시켰으리라.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그쪽으로 똑똑하다고 소문이 난 듯했다. 당시 살던 집의 벽에 붙여놨던 천자문을 다 외우고 있었는데 그걸 줄줄 읊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일부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구경도 오고 했다. 지금이라면 유튜브에 올렸을만한 신기한 광경 정도 되었겠다. 학교에 학부모들이 모이는 행사 때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들이 나를 보면 "네가 효석이구나"라고 다 알고 계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 90년대 초반에 부모님은 앞으로 정보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라면서 컴퓨터 학원에 보내셨다. GW-Basic 같은 것들을 배웠었는데 나는 학원 수업보다도 매일 수업 끝나고 빈 강의실에서 286 컴퓨터에 설치된 한글 1.5 워드를 켜고 한두 시간씩 소설을 쓰는 일을 했다. 왜 그걸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와 함께 매일 글을 쓰면서 놀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단편이었는데 당시 학원 선생님의 배우자가 국어교사라고 하셔서 내가 쓴 원고를 출력해서 드려보았고 피드백도 받아봤다. 그분께서는 "잘 썼고, 재능이 있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수년간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칭찬을 글쓰기에서 받은 일이다. 지금도 돌아보면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투자 중 가장 도움이 많이 된 것은 초등 시절 거의 내내 컴퓨터 학원과 미술 학원을 보내주신 것이다. 정작 두 분야에서 직업적인 재능을 피우진 못했으나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매일 신나게 워드로 글을 쓰는 재미와 습관을 만들 수 있었고 미술을 통해서는 창의적인 사고, 나아가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모든 상황과 환경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하여 졸지에 가세가 기울어졌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십여 년간의 기나긴 투병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버지 혼자 외벌이로 압류당하고 남은 월급으로 노모와 투병하는 아내, 그리고 두 자녀를 이끌고 IMF라는 상황을 뚫고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사춘기였던 나는 겉돌았고 학교 생활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못했다. 놀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어서 비관적인 상황에서 도피한 곳이 책이었다. 수업시간이나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그냥 좋아하는 책 속으로 도피했다. 어쩔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어둡고 막막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읽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많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생각에도 없는 대학교와 학과에 진학했다. 10대 내내 '진로'란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도 없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표류하듯 살았다. 성적은 무난히 잘 받으며 모범생처럼 살았으나 내가 무엇을 할지는 여전히 찾지 못했다.

15년 후 나는 수십 명의 대학생들에게 인턴십의 기회를 주었고,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게 진로 코칭을 해주었고, 수천 명의 청년들에게 진로에 관한 교육을 해주었는데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했던 나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졸업 이후 직업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차피 군 복무는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이왕 가는 거 월급이라도 받고 가자는 생각으로 지원했다. 재학 중 육군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은 것도 있기에 서른 살까지 무려 6년간의 임기를 시작했다. 평생을 예술가나 여행자처럼 살아온 나에게 직업 군인 역시 맞는 옷 일리 없었다.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흥미도 없이 그렇게 20대를 최전방에서 그냥 보낸듯하다.

그래도 그 전방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도 역시 독서였다. 고립된 생활에 대한 탈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갈증이 컸던 탓이었을까 즐겁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자체가 도피처라고 또 생각했다. 도서 대출 기간인 격주에 한 번씩 학교 도서관에 가서 대출 한도인 10권을 들고 복귀하여 2주 내내 읽고 또 반납하러 가서 새로 빌려오고 이런 생활을 5학기를 했더니 재학 내내 매년 최우수 대출자로 선정돼서 도서관장상을 받았다. 나는 이 학교에서 전과목 만점으로 최우수 졸업을 하고 우수 논문상 등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은 다 받고 졸업했지만 이 도서관장상이 가장 자랑스럽고 나 다운 상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30대가 되었다. 여전히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날 채용하겠다는 회사가 없어서 밀려나듯 창업을 했다.

수입 유통, 출판 기획, 리테일 등 알지도 못하는 사업들을 연달아해 봤고 다 실패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업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럼 그 배운 것들이라도 사람들에게 알려주자는 생각으로 지금 커리어의 시작인 경영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알아주지도 않는 경영학 석사 학위 하나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 기회들이 생겨서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프로젝트를 하면 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마감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육으로 내재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강의"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한 강의인데도 실수 한번 없이 너무 잘한 것이다. 그때 나는 유치원 재롱잔치 사회를 보던 일이 생각났다. '아 맞다. 나는 어려서부터 말을 잘한다고 인정받았었지...'. 뒤늦게 어린 시절의 재능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내 나는 경영 컨설팅 회사인 <키스톤 매니지먼트>를 기업 교육회사인 <서울비즈니스스쿨>로 바꾸고 그때부터 기업교육강사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2016년 정도인가, 그날 세미나에는 주말이고 유료인데도 백여 명에 가까운 기업교육전문가들이 모였다. 주제는 <교육사업 전략특강>. 우리나라의 난다 긴다 하는 업체의 실무자들과 심지어 대표들까지 모여서 내 세미나를 듣고 계셨다. 내가 이 주제를 다룰 만큼 교육사업분야의 전문가인가? 마치고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명함을 주시며 꼭 따로 뵙고 싶다고 해주셨는데 그때 나는 이 업계에 들어온 지 3년 차 되었을 때였다. 사람들이 내가 적어도 10년 차 이상은 된 것 같다고 말해준 것은 내가 사기를 친 것도 아니었고 허풍을 떤 것도 아니었고 그분들보다 탁월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쉽고, 재미있고, 핵심만"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나는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나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이 업계도 노력으로 되는 부분과 재능으로 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감사하게도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틀짜리 동영상 촬영을 단 한 번의 NG나 재촬영도 없이 원테이크로 끝내는 것, 다른 강사님들은 일주일은 걸려 만들 강의 슬라이드를 나는 서너 시간이면 끝내는 것, 현장에 빔프로젝터가 고장 나서 슬라이드를 못쓰는 상황에서 즉석에서 화면 없이 세미나를 했는데도 거의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진행한 것, 새로운 분야를 배울 때 남들보다 최소 몇 배 이상은 빠르게 배우는 것, 어떤 교육을 받아도 그다음 날이면 그 강사보다 그 주제를 더 잘 교육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재능의 영역이다. 주변부를 돌고 돌아 마침내 내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분야로 돌아온 것이다.




한때 나는 내 환경과 운명을 원망했던 적이 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뭘 잘하는지 알 수 있었다면. 내 재능을 살려줄 수 있을 멘토를 만날 수 있었다면. 내 재능을 살려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면. 집에서 이런 나의 진로에 더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부유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업가가 된 이후로는 다행히 맞는 옷은 입었지만 쏟아지는 일에 마치 내 인생은 해류에 휩쓸려 떠다니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많았다. 그 갈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인생은 돌고 돌아 결국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일 텐데 나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글쓰기로 돈벌이만 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나는 글을 계속 써오고 있었다.


내가 사업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소셜 미디어 글쓰기를 통한 퍼스널 브랜딩이다. 그럴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근 15년째 꾸준히 써오고 있다. 한창때는 업무 의뢰의 절반 이상을 페이스북 메시지로만 받아서 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페이스북으로 메시지가 하나 온다. "안녕하세요 최 대표님, 다름이 아니라 강의를 하나 요청드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내가 여쭤본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서로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아시고 강의 의뢰를 주시게 되셨나요"라고 여쭤보면 나오는 답이 걸작이다.

"네 평소에 페이스북에서 글을 잘 보고 있어서요."


사실 이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 수백에서 수천만 원도 하는 기업의 프로젝트를 단순히 '페이스북에서 본 글이 좋아서' 맡긴다는 것이 맞는 것인가?

회사에서 직원에게 채용 오퍼를 넣을 때도, 새로 파트너사에게 협력을 넣을 때도 평소 내가 보던 글을 보고 신뢰가 가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구축된 퍼스널 브랜드 가치가 신뢰관계를 만들게 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때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와이프도 결혼할 때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당시 나는 직업이 없는 백수였고 와이프는 대기업 직원이었다. 나중에 와이프에게 왜 나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고'라고 이야기했다. 이 정도면 글쓰기는 어쩌면 내가 모르게 내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된 무기가 아닐까.


사실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글을 써왔지만 경력으로 쓸만한 글은 별로 없었다. 책을 몇 권 출간하기는 했지만 출판사의 요청으로 가볍게 쓴 것들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각 잡고 쓴 책은 아직 없다. 그간 페이스북에 쓴 글들만 묶어도 두어 권은 족히 나오고도 남고, 평소에 하는 강의 자료를 텍스트로만 바꿔도 한 달에 한 권은 출판할 수 있고, 지금도 목차 구성만 끝내 놓은 단행본 기획안이 개는 있다. 그럼에도 아직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별로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도 돌아보면 나는 이미 글쓰기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하는 강의 중 <비즈니스 글쓰기>는 일 년에 100번 이상 하는 스테디셀러 콘텐츠였다. 돈을 받고 쓰는 칼럼도 100편 이상 작성했다. 기획서나 제안서 등 글쓰기 스킬을 활용하여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꽤 많이 있었다.

마치 내 운명은 한 방향을 가르치고 있는데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나는 해류에 떠밀려 다니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산란을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였다. 쉬지 않고 투쟁하듯 살아가면서도 나는 늘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아직은 거친 물살 위에 있지만 이것을 거슬러 건너면 내가 낳는 알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이 결국 글을 쓰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열심히 사업을 하고 있지만 만약 운이 좋아한 10여 년 뒤 지금 커리어에서 은퇴할 수 있다면 그제야 어려서부터 나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하라고 했던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시금 길지 않은 나의 삶을 돌아본다.

모든 사람에게는 빛나는 각자의 재능이 있다. 어떤 사람은 탁월한 신체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타고났다. 어떤 사람은 숫자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타고난 사람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강점"이라 부른다.


글 쓰는 일은 나에게 강점인가? 아주 탁월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적어도 나보다 강의 잘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있다면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수백 명 있겠다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컨설턴트에서 강사로 경력을 이어가다가 비즈니스 코칭이라는 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이전까지는 경영학과 교육학 지식을 이용하였다면 이 영역은 마음을 다루는 분야여서 심리학도 공부하게 되었다. 상담심리에서 시작한 나의 학습 여정은 명상, 테라피 등을 거쳐 사이코드라마나 표현예술치료 같은 영역까지도 갔다. 이때 나는 놀라운 것을 하나 배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치유 수단이라는 것이다. 사실 표현예술치료의 핵심은 Inside-out이다. 내면의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인데 연극치료는 연기로, 미술치료는 그림으로, 음악치료는 소리로 표현하듯 글쓰기 테라피는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한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40년 넘게 살아온 내 인생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 내가 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왜 평생에 걸쳐 원하는 일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내가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곳이때문이었다.

성장기에 날 보는 사람마다 말과 글을 잘한다고 칭찬해줬고, 사춘기 때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도피한 곳이 책이었고, 대학과 대학원 때는 글과 책으로 다시 인정을 받고, 군대 시절엔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힘든 업무 중에도 다시 책으로 도피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것으로 다시 인정을 받아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내 인생을 '글'이라는 렌즈로 보면 나는 항상 이 외줄 위에서 인정 욕구와 도피 욕구를 반복하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삶이란 해류에 휩쓸리면서도 글을 계속 써왔고 사업이라는 롤러코스터를 타면서도 글을 써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것을 알고 나니 해방감이 찾아왔다. 더 이상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한 글을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좋아요를 받기 위해 구걸하는 글이나 관심을 얻기 위한 홍보글은 내게 생명력을 잃었다.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나의 삶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대출 순위에서 10년간 1위를 한 명저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무려 1937년에 태어난 생리학자다. 그는 의과대학에서 초기 연구 활동을 숱하게 하였다가 일곱 살 때부터 취미였던 새 관찰로 인해 생리학으로 대학원을 진학하고 이후 언어학, 생태 지리학 등을 폭넓게 공부하며 멀티 사이언티스트로 인정받으며 첫 책인 <제3의 침팬지>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의 지리학, 조류학, 생물리학, 생리학, 진화생물학, 인류학적 지식이 총망라된 최고 베스트셀러인 <총, 균, 쇠>가 1997년 나왔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60세였다. 그 이후 우리가 아닌 그의 히스토리가 시작된다. 60세부터 말이다.


만약 내가 작가가 된다면 히가시노 게이고나 스티븐 킹처럼 일 년에 베스트셀러 두 권씩 평생을 발표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그럴 나이는 지났다. 움베르토 에코처럼 본업과 전혀 무관하게 글을 써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쓸 실력도 안된다. 그런 나에게 작가로서 롤 모델은 재레드 다이아몬드다.

그간 많은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지는 못하였으나 내년부터는 나의 이런 생각과 욕구를 책을 통해 표출해보고 싶다.


출판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은 해가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 것을 넘어 텍스트를 읽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시대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작품 활동으로는 생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그나마 가장 연관성이 있는 경제활동이 강의 정도이고 실용서를 쓰는 작가들은 관련된 컨설팅 등으로 인세로 버티기 어려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그런데 강의와 컨설팅은 내가 가장 잘하는 분야고 이미 업계에서 탄탄히 자리를 잡았으며 애초에 청년 작가로 데뷔했어도 겸업으로 했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란 걸 알았다.

결국 순서의 문제이지 작가로 데뷔하고 생업을 위해 강의나 컨설팅을 하는 대신, 나는 이미 강의나 컨설팅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 그야말로 경제적 고민을 없애 놓은 상태에서 글만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 생각하니 이 역시 유레카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제 보다 많은 글을 더 쓰려한다. 내년부터는 쌓아놓은 기획안들을 하나씩 풀며 내 지식, 경험, 이야기를 세상에 공유하려 한다.


22년 한글날.

글 쓰는 사람, 최효석.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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