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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석 Apr 04. 2022

내 대학시절 가장 보람찼던 일.

<꿈이 있는 아이들> 어린이 중창단, 2000~2003

나는 청소년기에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서였는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며 살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그런 고민을 하던 1학년 2학기 때 정말 우연한 기회를 소개 받게 되었다.


우리 학교가 위치한 OO동의 사회복지관에서 인근의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을 모아 중창단을 만들어보자는 계획이 있었다. 아무 경험 없던 나였지만 성가대에서 활동을 많이 했었다는 이유 하나로 기꺼이 지휘자로 자원했고 인근 다른 대학에 다니던 선생님 한분이 반주자로 봉사해주셔서 그렇게 <꿈이 있는 합창단>이라는 조그만 어린이 중창단이 탄생했다.


그야말로 열악했다. 동네 사회복지관에서 만든 사업이긴 하나 예산이 있을리도 없었고, 그렇기에 지휘자인 나나 반주자 선생님이나 모두 활동비도 없이 낡은 피아노 하나 달랑 있는 강당에서 모였다. 


모집된 학생은 예닐곱명 이었다. 그중에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온 어린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저소득층 가정에서 온 초등학교 4~5학년 여학생들이었다. 


우린 전문성도 없고 자원도 없었지만 열정은 넘쳤다. 나는 학교의 합창 지휘 전공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꼭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덕분에 부전공 레슨 형태로 수강신청을 하는 방식으로 졸업때까지 7학기 동안 개인 렛슨을 받을 수 있었다. 반주자도 학교 생활하느라 바쁠텐데 합창단 반주 외에도 <바하 음악교실>이라는 피아노 수업도 만들어서 단 한 번의 결근도 없이 함께 키워갔다. 우리 어린이들도 이 모임이 재미가 있었는지, 한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매주 연습 마친 후 함께 놀러도 다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복지관도 이런 열정에 고마워하며 예산은 없지만 최대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다 해주셨다.


나는 처음에 이 모임이 3개월 과정 정도만 하고 마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그러지 못하고 반주자도, 아이들도 그만두지 못했다. 너무 재미있고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저희 합창단 계속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혀서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비장한 자세로 관장님을 찾아가서 이 모임을 상설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 비록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최선을 다해 운영해보자고 말씀을 드렸다. 이때가 내 나이 열 아홉살때였다.


이 합창단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갈 때까지 이후 3년 반을 꼬박 운영했다. 군 입대를 앞둔 2003년 겨울. 그동안 연습은 계속 해왔지만 변변찮은 공연도 한번 못해서 이번 기회에 송년 음악회라도 열어보자고 했다. 대관할 곳이 없어서 평소 연습하던 강당에 각자 가져온 갖가지 소품들로 꾸몄다. 단복을 맞출 여력도 없어서 학부모들께 집에 가지고 있는 가장 예쁜 치마들을 골라서 입혀 보내달라고 하였다. 나도 한벌 있는 양복을 입고 나왔다. 관객이라곤 아이들의 부모님과 복지관 직원들 뿐이었다. 캐롤 소리와 트리 전구 위로 하얀 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따뜻함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그때의 장면은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돈도 봉사시간 같은 것도 전혀 없었지만 돈으로 살 수 없을 경험을 배웠다. 복지관에서 힘써 주셔서 마지막 해에는 시에서 주는 상도 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한국의 엘 시스테마 같은 단체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록 돈도 힘도 없었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전문가와 이 복지관보다 더 많은 예산이 있는 곳들이 신경 쓴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따뜻함으로 채워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 것 없이도 우리들은 해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 생활도 남부럽지 않게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또한 여러가지 경험하고 이룬 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경험도 이것과 비할 것은 없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다. 그 순수했던 열정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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