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can change the world
1. Interview
"왜 이 일을 선택하셨고, 이 회사에서 일하시면서 어떨 때 보람을 느끼시나요?"
일러스트레이터 채용을 위한 면접에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친구에게 역으로 받은 질문이다.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질문 앞 뒤 맥락을 따졌을 때, 디자이너로서 에이전시, 스튜디오가 아닌 인하우스 디자인이 어떤 메리트가 있냐는 다소 패기 넘치는 질문이었기에 제한된 인터뷰 시간 안에 그 친구에게 설명을 할 만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면접관들이 적당한 대답으로 인터뷰를 마무리지으려 하자 그 친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전 이분 답변을 꼭 듣고 싶은데요."라고 말했다.
"음... 전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거든요. 그리고 이 회사에서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바꿔 볼 기회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대답을 끝으로 흐지부지 인터뷰가 끝났고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면접에서 탈락했다. 아마 살면서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친구에게 적어도 내 대답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해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2.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
어찌 보면 엄청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내 생각은 소박하다. 탐스 슈즈나 프라이탁 가방처럼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오는 환경적인 이야기도, 정치성향이 강한 선동 포스터 디자인 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디자인 조직은 늘 서포트하는 조직처럼 여겨지고, 대부분 인하우스에서 기획자, 편집자, 에디터, 마케터들이 기획을 다 마친 후 마무리 단계에서 치는 조미료 정도로 디자인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디자인을 잘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여기서 '잘'이라는 것은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고 늘 그런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임한다. 내 이야기를 조금 더하자면, 지금 나는 이베이 코리아 브랜드디자인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베이 코리아는 이베이 외에 G마켓, 옥션, G9 세 개의 쇼핑 플랫폼을 운영 중이다. 그럼 이베이는 e커머스 회사이며, e커머스 디자인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이베이가 단순히 물건을 파는, 혹은 판매자와 중계자를 연결해주는 회사라 생각하지 않는다. 더 쉽게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결제와 배송에 관련한 일이다. 상품을 고르고, 금액을 결제하고, 주문한 물건을 받는 과정에서 사용자가 느끼는 불편함 들을 최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용자는 물건을 구매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함, 스트레스, 시간 등을 줄일 수 있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자그만 알갱이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책을 만들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보기 좋고 멋진 디자인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콘텐츠를 제공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가장 저자의 의도를 잘 구현해 줄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또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콘텐츠를 제공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책의 구성, 판형, 재질, 제작 방식,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야기이다. 글줄이 자연스럽고, 책 넘김이 자연스러워 기분 좋게 원고가 읽히면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잘 전달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아주 작은 부분일 수 있지만 이것 또한 디자인으로 대상의 생각, 사상을 키우거나 방해한 꼴이 된다. 때문에 디자이너는 의도적으로 불편한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이 작은 생각의 차이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처음 디자인을 배울 때 디자인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칼을 쓰는 법, 책을 잡는 법,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 법 등을 먼저 배웠다. 책은 책의 입장을 생각해서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칼을 사용할 때는 칼과 자의 입장을 생각해서 아프지 않게 자의 뒷면을 사용해 칼질을 했다. a4용지를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 가볍게 들고 있으면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이는 내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도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계속 진화하고 디자인 분야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때론 비중 있는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하기도 하고, 별 볼 일 없게 느껴지는 디자인을 쳐내며 스스로 하찮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크고 작은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디자인으로 세상이 바뀐다면 조금은 더 책임감을 가지고 디자인을 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태도로 디자인을 대하는 것이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본분이며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 오늘도 세상을 바꾸러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