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이병 시절, 사수에게서 일에 대해 별로 배우지 못했다. 그는 매우 착하고, 성실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일지, 군 생활은 몰라도 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뒤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남들에게 듣기로는 그랬다. 나는 그의 막내 시절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나는 조교라는 보직을 맡고 있었고, 특성상 소대 편성 인원이 4명이 전부였다. 소대 당 훈련병은 50명 안팎이었므로, 국방부는 조교 한 명이 평균 12.5명의 훈련병을 돌보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조교 한 명이 평균 40명의 훈련병을 돌본다. 군대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이려니 할 수 있지만, 그 내면엔 가혹한 실상이 있다.
하루는 간부가 내게 말했다.
어차피 실제로 소대를 관리하는 것은 두 명이다. 한 명은 곧 갈 놈, 한 명은 이제 온 놈. 실제 가용 되는 사람은 두 명이란다. 사실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더 했다. 바로 군번이 꼬였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왔을 때, 우리 소대는 병장 2명, 일병 말, 그리고 이병인 나로 구성됐다. 군필자라면 여기까지만 들어도 예상이 갈 것이다. 보통의 부대라면 반대로 군 생활을 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병장들이 모두 전역해 버리고 난 6개월 차이 나는 사수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일이라곤 젬병인 아주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 모든 일을 믿고 맡기는(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통받았다.
조교는 할 일이 매우 많다. 막내 조교라면 더욱 그렇다. 훈련병은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오후 10시에 잠든다. 그러면 우리는 훈련병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자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야 한다. 근무 시간이 하루에 16시간이 넘어간다. 게다가 막내 때는 일만 하겠는가. 선임에게 혼나고, 내일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또 선임에게 물어보고 공부하다 보면 밤 11시가 훌쩍 넘어가 버린다. 그제서야 간신히 잠드려고 하면, 선임들은 아직도 TV를 보고 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내가 병장이 되어보니 아주 재밌었다) 그렇게 하루에 6시간씩 자 가며 일했다.
그런 생활을 둘이서 해도 모자랄 판인데 혼자서 했다고 생각해 보면 참 그때의 내가 기특할 지경이다. 바로 옆 소대의 동기랑 같이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서로 의지하면서 묵묵히 일했던 때가 생각난다. 그 친구도 상당히 고생 많이 했다. 아마 나보다 더 하면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폭풍 같던 일병 시절도 정신 차리고 보니 지나가고, 어느새 내 가슴팍엔 작대기가 하나 더 그어져 있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히 짓밟혀버리고 말았다. 우리 중대에 단 한 명뿐인 보급병의 전역으로 그 대타를 잠시 맡아줄 조교가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내 부사수였다. 난 정말 반대했고, 소대장님도 정말 반대했지만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 피해를 떠맡을 사람이 바로 내가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그렇다고 보급병이 된 부사수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6개월 동기제였기 때문에 나와 2개월 차이 나는 내 부사수도 사실 나랑 동기였고, 그리고 보급병도 꽤나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거진 상병 4호봉이 될 때까지 부부사수를 다시 또 키우며 열심히 일했다.
그런 삶을 살던 와중 자연스레 가지게 된 철학이 있었는데, 내 부사수에겐 적어도 나 같은 처지는 피하게 해 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내 후임은 절대로 방치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일도 많이 도와주고 모르는 거 있으면 모두 알려주고 잘 하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게 후임에겐 다시 화살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후임은 내가 그만 좀 간섭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제는 자기도 잘 할 수 있는데, 허구한 날 중대로 내려와서 자길 지적했다고 했다. 그때 내가 충격을 좀 받았었다. 나의 힘들었던 군 생활을 후임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그 것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하니 내 가치관이 흔들렸다. 내가 경험했던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시소의 한쪽이 너무 가볍다고 바위를 마구 올리다 보면 반대쪽이 또 너무 가벼워지는 법이구나.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리에 맴돌았다. 어떻게 하면 후임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하고 전역해 버렸다. 굳이 내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쉬운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옛 고민이 다시 떠올라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론을 가져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뜻을 나누기 위해 이렇게 써 본다.
내가 가진 지혜나 가치관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와 아주 닮은 사람이더라도 내 생각을 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잘 나타난다. 그렇다고 내가 가르칠 사람을 방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나의 지혜가 아닌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다. 지혜는 언제나 통용되는 현명한 선택이고, 지식은 단지 내가 보고 듣고 겪었던 정보에 불과하다. 나에게는 이 지식이 지혜일 수 있어도 그들에게는 아닐 수 있다. 따라서 난 지식만을 전달해야 하고, 그들에게 내가 준 지식으로 자신만의 지혜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책을 읽는 방법과 비슷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들이 삶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은 한 명의 사람일 뿐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삶의 조각들을 주워 모아 나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어야만 한다.
요즘 군대가 많이 짧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똑똑하고, 능력 있고, 생각이 깊은, 또 반대로 생각이 얕아 보이고, 불성실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삶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직 조각으로 남아 있지만, 몇몇은 이야기가 되었고 나 자신이 되었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게 굉장히 즐겁다. 주변에서 힘들다고 만류했던 조교 생활이었지만,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훈련병 시절로 돌아간다면, 주저하지 않고 조교로 지원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