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가드의 척박한 밤. 맹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변방 성채의 두꺼운 유리창을 할퀴듯 때리고 있었다. 성채의 가장 깊고 따뜻한 방 안,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는 죽은 유론과 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카일의 어미인 노을 엘리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이내 굳게 닫혀 있던 참나무 문이 열리며, 며칠간 유르가드 본성의 사냥제에 참석했던 아들 산맥 카일이 피로가 역력한 얼굴로 돌아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복형 유론의 끔찍한 독살 소식, 그리고 사르칸의 왕좌를 찬탈한 제논의 광기까지. 그 무거운 진실들을 한꺼번에 짊어지고 험준한 눈보라를 뚫고 온 카일의 넓은 어깨는 지독하게 처져 있었다.
"돌아왔구나, 카일."
엘리가 다가가 아들의 차가워진 뺨을 쓰다듬었다.
"어머니…."
비통함이 묻어나는 카일의 낮게 잠긴 목소리에, 엘리는 말없이 그의 두꺼운 모피 코트를 벗겨내며 다정하게 등을 토닥였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 차가운 북부의 칼바람 속에서 네가 얼마나 무거운 진실들과 싸우다 왔는지 어미는 다 안다. 오늘은 그저 따뜻한 불기운 속에서 아무 생각 말고 푹 쉬거라."
어머니의 부드러운 위로에, 카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승의 털가죽이 깔린 침상에 무겁게 몸을 뉘었다. 혹한의 여정과 깊은 슬픔에 지친 카일은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엘리는 잠든 아들의 곁에 앉아, 화로의 붉은 불빛이 일렁이는 카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르칸 왕조 특유의 단정하고 짙은 선과, 유르가드의 깊은 골격이 절묘하게 섞인 아들의 얼굴. 그 얼굴 위로, 엘리가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의 모습이 처연하게 겹쳐 보였다.
'어찌하여 나는 사르칸의 찬란한 왕비 자리를 잃고, 척박한 이 눈밭으로 쫓겨나 내 아들에게 남의 성을 주어야만 했을까.'
엘리의 푸른 눈동자가 서글프게 일렁이며, 아주 오래전, 모든 비극과 사랑이 시작되었던 그 아득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녀는 본래 유르가드 출생의 귀족, '설원 엘리'였다.
그녀의 아버지 설원 마크는 과거 유르가드를 지배했던 '얼음 왕조' 시절, 최고의 권력직인 금막관(金幕官)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당시의 얼음 왕조는 영주들을 핍박하고 폭정을 일삼으며 오직 강대국인 사르칸 왕실에만 굽실거리던 부패한 세력이었다.
결국 영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척박한 눈밭에서 함께 짐승을 사냥하며 피를 나누던 영주들은 산맥 가문을 필두로 반란을 일으켜 타락한 얼음 왕조를 무너뜨렸다. 새롭게 들어선 산맥 왕실은 과거의 악습을 타파하고 완전한 평등을 추구했다. 그들은 차별적인 금막관 제도를 전면 파기하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기사와 영주가 한데 모여 갓 잡은 짐승의 피와 불술을 나누는 '사냥제'를 유르가드만의 새로운 전통으로 세웠다.
제도가 파기되며 설원 마크는 권력을 잃은 전(前) 금막관이 되었지만, 그는 결코 귀족으로서의 고고한 긍지를 잃지 않았다. 새로운 산맥 왕실 역시 표면적으로는 구시대의 잔재를 타파했으나, 이 척박한 대륙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마크의 연륜이 몹시 필요했다. 결국 마크는 금막관이 아닌, 산맥 가문에 지혜를 나눠주는 현명한 '조언자'로서 곁에 남아 새로운 왕실을 든든하게 보필했다.
시간이 흘러, 유르가드의 새로운 산맥 왕조는 사르칸으로부터 정식 국가로서의 명분과 인정을 받기 위해 대규모 사절단을 꾸려 사르칸 본성을 방문했다. 조언자인 설원 마크 역시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동행했고, 그 무리 속에는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눈부신 소녀, 설원 엘리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찬란한 사르칸의 궁성에서, 엘리는 훗날 사르칸의 왕이 될 서른세 살의 왕자, 노을 리온과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사르칸 왕족 특유의 흑단 같은 머리칼과 단정하고 기품 있는 동양인의 이목구비를 지닌 리온. 그는 유르가드 특유의 서구적인 외모—눈부신 은발과 바다를 담은 듯 깊고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열일곱의 이국적인 소녀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리온을 완벽하게 매료시킨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결코 굽히지 않는 고고한 성정이었다.
어느 날, 양국의 화합을 명분으로 거대한 사냥이 열렸다.
여태껏 유르가드의 사절단들은 사르칸의 강대한 힘 앞에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비굴하게 굽실거리기 바빴다. 리온은 과거의 얼음 왕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들의 그 비굴한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고, 내심 유르가드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리온이 쏜 화살이 숲속을 가르며 거대한 수사슴의 목에 꽂혔다. 사르칸의 기사들이 환호하며 사슴의 숨통을 끊어놓았을 때, 엘리는 홀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슴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사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작은 목소리로 유르가드 전통의 짐승을 위한 위령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 모습을 본 리온이 코웃음을 치며 조롱했다.
"나약하군. 약육강식의 이치에 따라 거둔 짐승의 고깃덩어리 앞에서, 대체 무슨 의미 없는 신음 소리를 내는 거요? 그깟 기도를 올린다고 짐승이 되살아나기라도 한답니까?"
비아냥거리는 사르칸 왕자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지만, 엘리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리온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단단한 기백이 서려 있었다.
"우리 유르가드의 백성들은 생명을 그저 사르칸의 흔한 오락거리나 식량쯤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왕자님께서 취하신 이 생명의 살점이 혹한을 견디는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기에,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준 이 고귀한 희생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
"생명에 대한 감사는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 척박한 설원을 살아남은 자들이 지켜온 고결한 긍지입니다."
여태까지 사르칸의 권력 앞에서 굽실대기 바빴던 유르가드의 늙은 관료들과 달리,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생명의 존엄을 주장하는 설원 엘리의 기품 있는 자태.
리온은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이 오만하고 당돌한 북부의 꽃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다는 맹렬한 사랑과 열망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리온의 적극적인 구애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붉은 강물처럼 깊어졌고, 리온은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인 사르칸의 노을 발락 왕과 어머니 노을 라켈 왕비 앞에 무릎을 꿇고 엘리와의 혼인을 선언했다.
"불가하다! 왕실의 핏줄도 아닌 데다, 척박하고 야만적인 유르가드 출신의 계집을 어찌 사르칸의 왕비로 들인단 말이냐!"
발락 왕과 라켈 왕비, 그리고 사르칸의 깐깐한 막관들까지 모두가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외동아들이었던 리온의 뜻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엘리를 지키겠다는 리온의 지독한 고집 앞에 결국 사르칸 왕실은 백기를 들었고, 두 사람은 모두의 축복과 은밀한 시기 속에서 화려한 혼례를 올렸다.
결혼 생활은 눈부시게 행복했다. 엘리는 사르칸의 왕비로서 눈부신 흑토 위에 뿌리를 내렸고, 곧이어 두 사람의 첫 번째 결실이자 훗날 사르칸의 왕이 될 아이, '노을 유론'을 낳았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행복은, 엘리의 고향 유르가드에서 불어온 피비린내 나는 폭풍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엘리의 아버지이자 유르가드의 현명한 조언자였던 설원 마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크가 죽자, 그의 동생이자 엘리의 큰아버지였던 설원 유단이 숨겨왔던 야심을 드러냈다. 그는 산맥 가문이 지배하는 평등한 제도를 부정하며, 과거 얼음 왕조 시절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산맥 왕실에 대한 끔찍한 역모를 꾸몄다.
그러나 반란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격노한 산맥 가문은 유르가드에 피바람을 일으켰고, 반역의 뿌리를 뽑기 위해 설원 가문을 말 그대로 '몰살'시켰다.
엘리의 친정인 설원 가문은 그날부로 대륙에서 멸족하다시피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 끔찍한 비보는 바다 건너 사르칸 왕실마저 발칵 뒤집어놓았다. 유르가드 산맥 가문과 외교적 마찰을 빚을 것을 우려한 사르칸의 막관들은 즉각 왕비 엘리를 향해 맹렬한 이빨을 드러냈다.
"멸족당한 반역자 가문의 더러운 피를 사르칸의 국모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
"당장 저 여인을 폐위하고 사르칸의 궁성에서 쫓아내야 하옵니다!"
막관들의 강력한 반발과 강요는 옥좌를 뒤흔들었다. 아무리 왕비라 한들, 뒷배가 되어줄 친정 가문이 멸족당한 이상 엘리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결국 왕이 된 리온은 거대한 권력의 압박 앞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지켜내지 못했다. 사르칸의 평화를 위해, 리온은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엘리를 폐위하고 궁성 밖으로 쫓아내야만 했다.
엘리가 유르가드로 쫓겨나기 전날 밤.
리온은 피눈물을 삼키며 엘리의 처소로 찾아들었다. 두 사람은 차갑게 식어가는 달빛 아래서 짐승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뼈저린 오열을 토해냈다.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권력의 소용돌이 앞에 갈라져야만 했던 두 사람의 그 마지막 동침은, 지독하게 슬프고도 처절했다.
다음 날, 엘리는 어린 유론을 궁성에 홀로 남겨둔 채 눈물로 붉은 강물을 건너 혹한의 유르가드로 쫓겨났다.
그리고 척박한 고향 땅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는 자신의 뱃속에 리온과의 마지막 밤이 남긴 새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르칸의 두 번째 적통, 바로 카일이었다.
하지만 엘리는 기뻐할 수 없었다. 멸족당한 역적, 설원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신과 사르칸 왕실에서 떨어져 나온 이 가여운 아이는 필시 수많은 가문 싸움과 암살의 표적이 될 것이 뻔했다.
'이 아이만큼은 지켜야만 해.'
결국 엘리는 가문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유르가드의 왕 산맥 칸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처참한 상황을 안쓰럽게 여겼던 산맥 칸은, 기꺼이 엘리의 청을 받아들여 뱃속의 카일을 자신의 서자(庶子)로 위장해 산맥 가문의 핏줄로 편입시켜 주었다.
그렇게 진정한 사르칸의 적통은 '노을 카일'이라는 위대한 이름 대신, '산맥 카일'이라는 변방의 영주으로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이 거친 눈보라 속에서 자라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
잠꼬대를 하듯 뒤척이는 카일의 묵직한 목소리에, 아득한 과거의 회상에 빠져있던 엘리의 눈동자가 현실로 돌아왔다.
화로의 장작이 탁, 하고 타들어 가며 붉은 불티를 허공으로 흩뿌렸다.
가문을 멸족당하고 쫓겨난 자신. 독살당한 가여운 첫째 아들 유론. 볼모로 넘겨진 차녀 예나,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짐승 가죽을 덮고 잠든 막내아들, 카일.
엘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카일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흑단 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 아이의 몸속에는 대륙에서 가장 고귀했던 노을 리온의 피와 맹수의 본능이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핏빛 옥좌를 차지한 제논의 광기와 붉은 강물의 재앙이, 결국 이 아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이 엘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잘 자거라, 내 아들아… 언젠가 네 몸속의 그 붉은 피가 거세게 요동칠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몰아치는 유르가드의 거친 눈보라 속에서, 과거의 영광과 상처를 모두 품어낸 어머니의 고요하고 애틋한 속삭임만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