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출발

by choiplan

물막이 산맥 중턱에 위압적으로 자리 잡은 잿빛 돌벽의 성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유르가드의 거친 눈보라가 두꺼운 유리창을 할퀴고 있었지만, 거대한 화로가 타오르는 영주 서리 말론의 응접실 안은 묵직하고도 따뜻한 열기로 가득했다.


얼마 전 험난한 눈보라 속에서 죽어가는 늙은 사제를 구조해 냈던 젊고 강직한 기사, 서리 달튼. 이 척박한 영지를 굳건하게 다스리는 말론과 셀리는 바로 그 듬직한 장남의 부모였다. 이날 두 사람은 모처럼 성채를 찾아온 귀한 손님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과거 사르칸의 찬란했던 첫 번째 왕비이자, 지금은 척박한 북부의 작은 영지에 머물고 있는 고고한 여인, 노을 엘리였다.

세 사람이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차를 마시던 그때였다.


삐이익-!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와 함께, 새하얀 깃털로 뒤덮인 거대한 눈매(雪鷹) 한 마리가 창가에 내려앉았다. 서리 셀리가 익숙하게 창문을 열고 매의 발목에 묶인 가죽 통에서 작은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달튼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유르가드 본성을 막 떠나며 띄운 모양이군요."


셀리의 날카롭고 이지적인 눈매가 양피지의 문장들을 빠르게 훑어내려갔다.


"종자 데일, 그리고 대사원의 길잡이 라제와 함께 본성을 무사히 출발했다고 합니다. 대사원의 늙은 고위 사제 어르신을 모시고 우측 대륙 엘로한의 시쿠미에 사원까지 향하는 숭고한 임무를 기꺼이 받들었다는군요."


먼 길을 나서는 아들의 굳건한 소식에, 화로 앞의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던 서리 말론의 묵직한 얼굴에 깊고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오. 대홍수의 징조를 품고 피신한 대사원의 고위 사제를 호위하는 것은, 우리 서리 가문이 짊어질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명예지."


말론은 과거를 회상하듯 깊은 눈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했다.


"엘리 부인. 부인도 그날의 거센 눈보라를 기억하실 테지. 얼음 왕조의 폭정에 맞서, 산맥 가문의 선대 왕이신 산맥 칸 폐하와 우리 서리 가문의 선조들이 가장 먼저 피 묻은 검을 치켜들었던 그 핏빛 밤을 말이오."


말론의 두꺼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쏟아지는 화살비와 끓어오르는 기름을 뚫고, 가장 먼저 웅장한 최후 방어선의 성문을 박살 낸 것이 바로 우리 서리 가문의 선봉대였소. 산맥 칸 폐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척박한 눈밭을 붉게 물들이며 본성으로 쳐들어갔던 그 생생한 기억이 아직도 내 핏속에 끓고 있지."


말론의 눈동자에 맹렬했던 혁명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본성을 완벽하게 장악한 후, 척박한 눈밭을 뒹굴며 피를 나눈 유르가드의 영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투표를 벌였소. 우리를 핍박하던 썩어빠진 구시대를 어찌할 것인가. 모두의 검을 걸고 만장일치로 얼음 왕조의 처단이 결정되던 그 순간의 뜨거운 열기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지. 한때 바다의 생명을 다루며 떵떵거리던 최후의 왕, '얼음 막스'가 제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산맥 칸 폐하의 발밑을 기어 다니며 비참하게 구걸하던 그 꼴이란! 기어코 그 폭군의 목을 베어내고, 이 유르가드에 진정한 평등과 긍지를 세워낸 충신들이 바로 우리 서리의 선조들이란 말이오."


말론의 묵직한 자부심에 엘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깊은 경의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영주님. 얼음 왕조의 끔찍한 압제 속에서 신음하던 이 척박한 유르가드가 지금의 평안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밤 가장 선두에서 굳건한 성벽을 부수고 피를 흘린 서리 가문의 고귀한 희생과 용맹함 덕분이었지요. 저 역시 늘 영주님의 가문이 세운 그 올곧은 뜻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기품 있는 화답에 말론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인의 아버님이신 설원 마크 공은 그 부패한 왕조 속에서도 유일한 예외셨소. 비록 얼음 왕조의 최고 권력직인 금막관(金幕官)이셨으나, 제도가 파기된 후에도 귀족으로서의 고고한 긍지를 잃지 않으셨지. 기꺼이 새로운 산맥 왕실의 현명한 조언자로 남아 지혜를 나누어 주셨던 진정 훌륭한 철인이셨소."


"맞습니다. 마크 공은 진정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셨습니다."


곁에 있던 셀리가 엘리의 손을 따뜻하게 쥐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산맥 가문의 입장이야 당연히 이해합니다만… 엘리 부인의 큰아버지이신 설원 유단이 그 헛된 야심만 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뼈저리게 원망스럽습니다. 그 자가 이미 끝난 얼음 왕조의 금막관 제도를 부활시키겠다며 역모를 꾸미는 바람에, 애꿎은 설원 가문 전체가 산맥 가문의 칼날 아래 참혹하게 멸족당하지 않았습니까."


셀리의 목소리에 짙은 연민이 묻어났다.


"친정이 멸족당하지만 않았어도, 든든한 뒷배를 잃은 부인께서 사르칸의 오만한 막관들에게 밀려나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시는 그 비극적인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엘리의 푸른 눈동자가 서글프게 일렁였다.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픈 과거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꺾이지 않는 고고한 자존심이 배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친 저의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허나… 그 사람의 마음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지요."


엘리의 담담한 대답에 셀리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노을 리온 선대 왕께서 부인을 얼마나 깊이 은애하셨는지. 사르칸의 그 거대한 권력과 막관들의 압박에 못 이겨 피눈물을 흘리며 부인을 내치셔야 했지만… 리온 폐하께서는 부인이 떠나신 이후, 승하하시는 그날까지 단 한 명의 새로운 왕비조차 곁에 들이지 않으셨지요. 그분의 심장은 언제나 이 차가운 유르가드의 설원 위, 엘리 부인의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득한 그리움이 세 사람 사이의 공기를 애틋하게 덥혔다. 하지만 이내 서리 말론이 굵은 핏대가 선 주먹을 탁자 위에 쾅 내려치며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토록 고귀했던 노을 리온 폐하의 붉은 옥좌를, 지금은 감히 창부의 핏줄인 노을 제논 그 미치광이 서자가 차지하고 앉아 있소. 나는 그 비열한 찬탈자 놈의 존재를 결단코 사르칸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소."


말론의 두꺼운 미간이 고통과 분노로 깊게 일그러졌다.


"무엇보다 내 피를 끓게 하는 것은 파도 요한 공의 참혹한 죽음이오. 엘리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죽은 요한 공은 우리 서리 가문의 먼 친척이지 않소. 우리 가문이 왕실의 핏줄과 이어져 있다는 명예로운 증거이자, 그 고귀한 핏줄로 사르칸의 금막관 자리에 오르셨던 훌륭한 분이셨지. 그런데 그 충직한 어르신이 정통성을 지키려다 찬탈자의 칼에 목이 달아나다니!"


"저 역시 그 참극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엘리가 찻잔을 꽉 쥐며 서늘하게 동조했다.


"대외적으로는 제 아들 유론이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떠벌리지만, 유론의 시신은 아직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가여운 제 아들은 필시 그 핏빛 참극 속에서 살아남았을 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시체가 없다면 죽은 것이 아니지요. 왕조의 핏줄뿐만 아니라, 저 썩어빠진 사르칸의 신앙 역시 지금은 거짓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말론이 극도로 낮고 억눌린 목소리로 짙은 분노를 토해냈다. 독실한 조정성교(調整聖敎)의 신도인 서리 가문에게, 사르칸의 현재 상황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끔찍한 신성모독이었다.


"정통성 없는 서자 놈이 제 권력을 다지겠답시고, 10세기 전 대홍수를 겪었던 위대한 대사원을 무참히 짓밟았소. 끝까지 꼿꼿하게 저항하던 숭고한 대성언관의 목을 단칼에 베어 입구에 매달아 놓다니! 게다가 그 끔찍한 학살 이후, 찬탈자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편성된 교단의 체제와 그 우두머리 사제들은 필시 제논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역겨운 배신자들일 것이 뻔하오."


신앙과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서리 가문의 영주로서, 말론은 사르칸의 이 모든 기만과 타락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나 창밖의 몰아치는 눈보라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거대한 어깨 위로 맹렬한 결의가 타올랐다.


"나는 더 이상 이 산맥에서 이 끔찍한 모독과 비극을 관망하고만 있을 수 없소. 부인, 나는 조만간 군장을 꾸려 아주 오랜만에 사르칸의 본성으로 방문할 참이오."


"영주님께서 직접 사르칸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셀리와 엘리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론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서리 가문의 기사이자 진실된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금막관 요한 공의 핏줄로서. 유론 전하의 죽음에 얽힌 진짜 진실과 썩어빠진 조정성교의 새 체제 이면에 숨겨진 추악한 흑막을, 내 이 두 눈으로 직접 낱낱이 파헤치고 올 것이오."


창밖으로는 유르가드의 혹독한 눈보라가 여전히 쉴 새 없이 성벽을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거대한 불의와 맞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늙은 영주의 단단한 신념은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


끝없이 펼쳐진 유르가드의 빙벽을 지나 마침내 바다와 맞닿은 대륙의 끝자락. 몰아치는 눈보라 너머로 기괴하고도 압도적인 풍경이 달튼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유르가드의 명물, '강철 항구'였다.


사르칸의 낭만적인 항구들이 향긋한 나무 향과 펄럭이는 부드러운 돛으로 가득하다면, 이곳 유르가드의 항구는 짐승의 기름이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와 귀를 찢는 듯한 육중한 금속음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혹독한 얼음 바다를 뚫고 나가야만 하는 환경 탓에, 이곳의 배들은 시커멓고 두꺼운 강철판을 겹겹이 덧대어 빚어져 있었다. 잿빛 하늘 아래 정박한 수십 척의 거대한 강철 배들은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검은 철갑상어 떼를 연상케 했다.


일행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위압적인 자태를 뽐내는 무역선 앞이었다. 미지의 사막 대륙 엘로한의 시쿠미에 사원을 향해 출항을 앞둔 거대한 쇄빙선(碎氷船)이었다.

달튼의 서늘한 시선이 쇄빙선의 독특한 구조를 흥미롭게 훑었다. 이 배의 선수(뱃머리)에는 평범한 나무장식 대신, 끝이 날카롭고 표면이 소용돌이처럼 파인 '거대한 나선형의 강철 뿔'이 무시무시하게 박혀 있었다. 거친 얼음 바다를 분쇄하며 전진하기 위해 고안된 유르가드 특유의 무식하고도 경이로운 기계 장치였다.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쇳덩어리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배의 넓은 갑판 위에는 마치 곡식을 빻을 때 쓰는 거대한 연자방아를 연상케 하는 묵직한 '강철 연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영하의 맹추위 속에서도 윗옷을 벗어 던진 수십 명의 근육질 선원들이, 터질 듯한 핏대를 세우며 짐승처럼 헉헉대며 그 강철 연자의 손잡이를 밀어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끼기기긱-! 쿠구구궁!


선원들의 엄청난 육체노동으로 강철 연자가 회전하자, 그와 맞물린 갑판 아래의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굉음을 냈고, 이내 뱃머리에 박힌 나선형의 강철 뿔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얼어붙은 바다를 잔혹하게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인간의 피와 땀을 갈아 넣어 쇳덩어리를 전진시키는 구조였다.

이토록 끔찍한 노동력이 요구되다 보니, 이 쇄빙선의 탑승료와 화물 운송비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천문학적이었다. 보통은 엘로한의 귀족들이 환장하는 유르가드 심해수의 진귀한 뼈나 상처 하나 없는 최상급 설원 늑대의 모피 같은 최고급 특산품을 넘길 때가 아니면 감히 배를 띄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비싼 배였다.


"아니, 이보쇼 선장 양반! 거 배 한 번 타는 데 무슨 은화를 스무 개나 내라 그러슈!"


항구 한구석, 출항을 앞둔 쇄빙선의 선장 앞에서 뚱보 종자 데일이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짐승의 털가죽을 겹겹이 껴입은 늙은 사제 메디슨 타일러가, 귓가를 때리는 굉음과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응시하며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런 씨부랄! 당신 눈깔엔 우리가 은화 자루라도 지고 다니는 부자로 보이슈? 물막이 산맥에서 털복숭이 괴물 놈들이랑 치고받느라 아주 개털이 됐단 말이여! 여기 이 불쌍하고 늙은 어르신이 추위에 덜덜 떠는 게 안 보이슈? 탑승료 좀 팍팍 깎아주쇼! 정 모자라면 저놈의 강철 연자, 내 이 두꺼운 팔뚝으로 가서 몇 시간 쌩쌩 돌려줄 테니까!"


데일이 산만 한 덩치와 터질 듯한 근육을 들이밀며 험악하게 윽박질렀다. 하지만 얼굴에 흉측한 칼자국이 난 험상궂은 선장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어림없는 소리! 우리 배의 강철 뿔이 공짜로 도는 줄 아나? 은화 스무 개가 없으면 얌전히 뗏목이나 엮어서 노 저어 가시지!"


데일의 무식한 협박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브라더 라제가 두 손을 성스럽게 모아 쥐고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선장에게 다가섰다.


"선장님. 부디 눈앞의 탐욕을 거두시고 숭고한 구원의 길에 동참하시지요. 저희 곁에 서 계신 저 어르신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을 무사히 모시는 성업(聖業)에 배를 내어주신다면, 평생에 눈부신 축복을 내려주실 텐데 어찌 그깟 얄팍한 은화에 눈이 멀어—"


"시끄럽소, 땡중 양반! 축복이 우리 선원들 밥을 먹여주진 않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험악한 뚱보 종자의 쌍욕과 독실한 사제의 설교가 번갈아 가며 선장의 혼을 쏙 빼놓았다. 핏대를 세운 질긴 입씨름 끝에, 기가 질린 선장이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에라이, 징한 놈들! 알았소! 겨우겨우 깎아서 은화 열다섯 닢! 열다섯 닢으로 타협합시다! 그 이하로는 우리 선원들 다 굶어 죽으니까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도 안 되오!"


"좋슈! 진작 그럴 것이지!"


마침내 은화 다섯 닢을 깎아내는 데 성공한 데일과 라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승리의 기쁨에 취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사이, 항구의 굉음에 미동조차 않던 늙은 사제 메디슨 타일러가 갑자기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선형… 굴착… 압력 분산의 비효율성…."


배의 앞머리에 박힌 강철 뿔의 회전 방식을 보며 기계적으로 내뱉는 지식의 파편이었다. 물론 뱃삯을 깎았다는 기쁨에 취한 데일의 귀에는 그저 노인네의 실없는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아유, 어르신! 이제 다 해결됐슈! 안 추운 방으로 모실 테니까 조금만 참으시구랴."


그때였다. 일행이 타고 온 말 두 마리의 처분을 마치고 돌아온 서리 달튼이 무심한 발걸음으로 그들 곁에 다가왔다.


"아이고, 나으리! 우리가 기어코 해냈구만유!"


데일이 땀범벅이 된 얼굴로 펄쩍 뛰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이 지독한 해적 놈팽이 같은 선장 놈이랑 뼈 빠지게 입씨름을 해서, 뱃삯을 은화 열다섯 닢으로 아주 기가 막히게 타협을 봤슈! 나 잘했지유?"


데일의 호들갑에, 달튼은 조용히 혀를 차며 두꺼운 늑대 가죽 코트 안쪽에서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선장에게 내밀었다.


"유르가드 왕실의 보증서다."


건조한 달튼의 목소리에 선장이 양피지를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유르가드의 왕, 산맥 루턴의 거대한 직인이 붉게 찍혀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과 여기 이 어르신의 여정은, 척박한 북부의 왕께서 직접 보증하셨지. 우리의 모든 뱃삯과 경비는 유르가드 국고에서 전액 지불하기로 되어 있다."


그 무시무시한 왕의 보증서에 선장의 험악했던 얼굴이 일순간 백지장처럼 파랗게 질렸다. 감히 왕의 손님들에게 돈을 뜯어내려 했다간 강철 연자에 묶여 바다에 던져질 판이었다.


"아, 아이고! 제가 몰라뵙고 큰 결례를…! 당장 짐을 싣고 모시겠습니다요!"


선장이 땅에 코가 닿을 듯 굽신거리자, 달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품에서 작고 영롱하게 빛나는 동전 하나를 꺼내 툭, 하고 선장을 향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선장의 두 손에 묵직하게 떨어진 것. 그것은 선장이 불렀던 은화 열다섯 닢의 가치를 아득히 상회하고도 남을, 사르칸의 최고급 세공술로 빚어진 눈부신 '금화' 한 닢이었다.


"수고비다. 배에서 제일 따뜻한 귀빈실로 내어주고, 노인 어르신을 융숭히 잘 모시길 바라지."


달튼에게 금화 한 닢 정도는 그리 아까운 금액이 아니었기에, 그저 긴 항해 동안 일행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가볍게 던진 팁이었다.

방금 전까지 식은땀을 흘리던 선장의 두 눈이 금화의 영롱한 빛에 홀린 듯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감격에 겨워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물론입죠, 나으리! 배에서 가장 훌륭한 선실로 융숭히 모시겠습니다요! 어이, 뭣들 하느냐! 어서 이 귀하신 분들의 짐을 올려드려라!"


선장이 간신배처럼 굽신거리며 짐꾼들을 향해 소리치자, 뒤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협상하던 라제와 데일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나으리…."


데일이 멍청한 눈으로 달튼을 바라보았다.


"우리… 공짜로 탈 수 있었던 거유? 게다가 방금 던진 거, 사르칸 최고급 금화 아니유…?"


"명색이 유르가드 최고의 긍지와 무력을 자랑하는 서리 가문의 장남이다. 어르신을 모시고 머나먼 뱃길을 가는데, 그깟 금화 한 닢 쥐여주고 제일 좋은 방에서 편하게 가는 게 낫지 않나. 안 그러신가, 어르신."


달튼의 부름에, 노인은 대답 대신 무기력하게 눈을 한 번 끔벅일 뿐이었다. 달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검을 고쳐 매고는 늙은 사제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배의 갑판을 향해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데일과 라제는 지독한 허탈감에 빠져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마주 보았다. 왕의 보증서로 어차피 무료로 탈 수 있었던 배. 게다가 달튼에겐 그깟 은화 열다섯 닢 따위는 푼돈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하… 허허허…."


"옘병… 씨부랄…."


라제의 허탈한 헛웃음과 데일의 기운 빠진 욕설이 강철 항구의 매캐한 연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거대한 강철 연자가 굉음을 내며 회전하고, 선수에 달린 나선형 강철 뿔이 유르가드의 얼어붙은 바다를 잔혹하게 부수며 맹렬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기계 지식을 읊조리는 사제와 그를 성스럽게 맹신하는 엉뚱한 대변인 사제, 입이 험한 괴력의 뚱보 종자, 그리고 든든한 보증서와 금화를 쥔 서늘한 북부의 기사까지. 미지의 사막 대륙 엘로한을 향한 그들의 소란스러운 항해가 마침내 거친 파도를 가르며 닻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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