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한 소금기와 썩어가는 선창의 악취가 진동하던 지옥 같은 어둠이 마침내 걷혔다.
사르칸의 거대한 대항만에서 출발하여 거친 바다를 건너온 무역선의 육중한 해치가 열렸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자, 낡은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앙상한 사내, 사르칸의 적출당한 왕 노을 유론은 비틀거리며 갑판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의 시야를 강타한 것은 과거 동생 제논이 묘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문명의 풍경이었다. 시야가 닿는 끝까지 푹푹 찌는 열기를 토해내는 모래사막 한가운데로 맑고 투명한 거대한 강줄기가 관통하고 있었고, 강변을 따라 뻗은 항구에는 집채만 한 황동빛 톱니바퀴들과 증기를 뿜어내는 기중기들이 굉음을 내며 화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대홍수를 겪지 않아 타 대륙보다 1세기는 족히 앞서 있는 엘로한 특유의 진보된 기계 항구였다.
"웩… 컥…."
유론이 뱃멀미와 독살의 후유증으로 부러질 듯한 갈비뼈를 부여잡고 항구의 돌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는 그의 귓가로, 배에서 화물을 내리던 거친 목소리들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항구장!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 아니오!"
덥수룩한 갈색 수염을 기른 무역선의 뚱뚱한 선장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엘로한 상인 연합 특유의 고급스러운 모시옷을 입고, 정교한 톱니바퀴 태엽이 달린 계산기를 든 깐깐한 인상의 항구장이 서 있었다.
"사르칸 대항만을 떠날 때 우리 배에 실은 목재는 분명 백 톤이었소! 그런데 바다를 건너오며 파도에 젖어 물을 잔뜩 먹은 것을 가지고, 몽땅 이백 톤어치의 관세를 매기겠다니!"
선장의 억울한 항의에도 항구장은 계산기의 태엽을 감으며 고압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엘로한의 거대한 증기 저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소. 저울의 눈금이 이백 톤을 가리켰으니, 측정된 무게대로 관세를 내는 것이 우리 상인 연합의 철칙이오. 당장 세금으로 은화 오백 닢을 내지 않겠다면 화물은 전량 압류하겠소."
거액의 세금을 물게 생겨 선장과 뱃사람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던 찰나였다.
"…저울 눈금이랑 씨름할 필요 없소. 배 바깥쪽을 보시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땅처럼 메마른, 그러나 몹시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소란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항구장과 선장의 시선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초라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유론은 덜덜 떨리는 마른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몸집은 작고 앙상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사르칸의 거대한 농경과 경제를 다스렸던 왕의 또렷한 통찰이 배어 있었다.
"젖은 옷이 마른 옷보다 무거운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유론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항구장을 직시했다.
"사르칸에서 분명 100톤의 나무를 실었소. 하지만 한 달 동안 험한 바다를 건너오며 파도와 비바람을 맞았으니, 저 바싹 마른 나무둥치들이 빗물과 바닷물을 잔뜩 빨아들인 거요. 나무가 더 실린 게 아니라, 저 나무가 머금은 '바닷물 무게'가 더해진 거란 말이오. 배 바깥에 칠해둔 출항 선과 지금 물높이가 똑같지 않소."
너무도 단순하고 직관적인 비유에 선창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상인 연합의 그 대단한 증기 저울은 지금 나무의 무게를 잰 것이 아니라, 저 나무가 머금고 있는 엘로한 앞바다의 바닷물 무게까지 달고 있는 셈이지. 당신들은 지금 나무가 아니라 바닷물에 세금을 매길 작정이오?"
유론이 짚어낸 단 한마디에 험악하게 달아올랐던 선창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누구나 단숨에 알아들을 수 있는 완벽하고도 명쾌한 논리였다.
"아…! 맞소! 젖어서 무거워진 것뿐인데 왜 우리가 바닷물 무게까지 세금을 내야 한단 말이오!"
선장이 이마를 탁 치며 환희가 섞인 탄성을 터뜨렸고, 엘로한의 항구장 역시 계산기를 든 손을 멈춘 채 멍한 눈으로 눈앞의 왜소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엘로한은 대홍수의 재앙을 겪지 않아 신을 믿지 않는 대신,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철저한 능력주의의 땅이었다. 그들에게 신분이나 볼품없는 겉모습은 이윤을 창출하는 비상한 머리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항구장의 뱀 같은 눈동자에 이내 몹시 흥미로운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의 오만함을 살짝 거두었으나, 여전히 엘로한의 관리다운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며 유론에게 다가왔다.
"참으로 놀라운 눈썰미요. 남루한 행색을 보아하니 그저 상선 밑바닥에 숨어든 밀항자인 줄 알았건만, 그 지혜만큼은 웬만한 엘로한 상인들보다 훨씬 예리하군."
항구장이 유론을 향해 턱을 치켜들며 제안의 손을 내밀었다.
"선생. 당신같이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자가 어찌 그런 밑바닥에서 굴러왔는지는 묻지 않겠소. 허나, 내 밑에서 장부를 한 번 정리해 보지 않겠소? 당신의 그 훌륭한 머리라면, 우리 상인 연합의 복잡한 세수 장부를 다루는 데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 같소만."
유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막대한 은화가 오가는 항구의 장부를 맡기겠소. 덤으로, 백 년은 앞서 있는 우리 엘로한의 진보된 기계 의술이라면… 당장 피를 토하고 죽어갈 듯한 선생의 그 병든 몸뚱이도 기꺼이 치료해 주겠소."
치료를 보장한다는 조건. 그것은 제논의 독살 후유증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유론에게 가장 필요하고도 완벽한 동아줄이었다.
유론은 자신의 초라한 뼈대와 낡은 천 쪼가리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실소를 지었다. 피 웅덩이 위로 나뒹굴던 늙은 충신 파도 요한의 잘린 목, 그리고 모든 것을 빼앗고 자신을 멸시하던 찬탈자 제논의 서늘한 얼굴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뜨거운 이국의 사막에서 다시 세상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기꺼이 그리하겠소. 당신의 훌륭한 장부잡이가 되어 드리리다."
유론이 피가 맺힌 입술을 깨물며 덤덤하게 항구장의 손을 맞잡았다. 사르칸의 가장 고귀했던 적통 왕이 모든 것을 잃고, 낯선 기계 문명의 대륙 엘로한에서 작은 회계사로서 새로운 생존과 반격의 톱니바퀴를 맞물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붉은 촛불이 은은하게 일렁이는 사르칸 궁성의 가장 깊고 은밀한 침소.
두꺼운 벨벳 휘장이 쳐진 거대한 침상 위로, 두 남녀의 나른하고도 짙은 온기가 얽혀 있었다. 핏빛 찬탈극을 거쳐 사르칸의 절대자가 된 노을 제논과 엘로한에서 온 교차왕녀 태양 제나였다. 한때 옥좌를 빼앗은 폭군과 갇힌 볼모였던 두 사람은, 지독한 결핍과 고독을 나누며 이제는 한 침대를 쓰는 내밀하고 완벽한 정치적 연인이 되어 있었다.
제논은 제 너른 가슴팍에 기대어 있는 제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방금 전 전해 받은 문서를 입에 올렸다.
"유르가드의 늙은 늑대, 서리 말론 영주가 군장을 꾸려 이 본성으로 오겠다는 정식 서신이 당도했소."
제나의 맑은 눈동자가 제논을 올려다보았다.
"서리 가문의 영주라면, 지난 반역의 밤에 유론 전하를 지키려다 참혹하게 목이 잘려 죽은 전 금막관 파도 요한의 먼 친척이자 독실한 조정성교의 신도라 들었습니다...."
"그렇소. 게다가 사르칸과 유르가드를 잇는 물막이 산맥의 막강한 군사력을 쥐고 있는 고집불통이지. 필시 요한의 죽음과 대사원 학살극에 대한 불만을 품고, 시체조차 없는 유론의 흔적을 제 두 눈으로 파헤치기 위해 들이닥치는 것일 테지. 사르칸의 국경을 넘자마자 그 늙은이의 목을 쳐버릴까 생각 중이오."
"안 됩니다, 전하."
제나가 제논의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추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만류했다.
"명분 없는 살육은 유르가드 산맥 왕실의 분노를 사 불필요한 전쟁을 야기할 뿐입니다. 오히려 그 늙은 늑대가 스스로 전하의 발밑에 복종하도록 묶어두는 편이 훨씬 영리합니다. 전하께서 친히 독주를 내려 죽이신 갈색 벤시의 자리, 텅 비어있는 오른막관(右幕官)의 자리에 서리 말론을 앉히십시오...."
그 파격적인 제안에 제논의 눈매가 의아함으로 크게 좁혀졌다.
"사르칸 제일의 무력과 왕실 군대를 통솔하는 오른막의 수장 자리에, 타 대륙인 유르가드의 영주를 앉히란 말이오?"
"서리 가문은 과거 얼음 왕조의 폭정을 끊어내고 유르가드의 평등을 세운 가장 숭고하고 명예로운 핏줄입니다. 누구도 그가 오른막관에 오르는 명분과 고귀함을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유르가드의 막강한 군사력을 쥔 자를 사르칸의 핵심 무관으로 품는다면, 위태로운 양 대륙 간의 우호를 굳건히 다지는 완벽한 인질이자 방패가 됩니다. 서리 말론이 사르칸의 군권을 쥐고 있는 한, 유르가드는 절대 사르칸을 공격할 수 없으며 전하의 옥좌를 노리는 내부의 불만 세력들 역시 완전히 기가 꺾일 것입니다."
단순히 적을 베어내는 것을 넘어, 적의 명예와 힘을 옥좌의 방패로 역이용하는 눈부신 통찰력이었다. 제논의 나른하던 눈동자에 또 한 번 깊은 전율과 매혹이 스쳤다.
"당신의 지혜는 늘 과인을 소름 돋게 하는군. 당신이 내게 완벽한 오른막관을 찾아주었으니, 이제 과인이 당신에게 완벽한 자리를 내어줄 차례로군."
제논이 제나의 귓가에 입술을 댄 채 낮게 속삭였다.
"나의 곁에서 사르칸의 금막관(金幕官)이 되어 주시오, 제나."
"…금막관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나의 두 눈이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커지며,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금막관은 오직 왕의 핏줄이 섞인 친척들 사이에서만 추대될 수 있는 자리이자, 왕의 신발 모양을 딴 황금 잔을 쥐는 대륙 최고의 절대 권력이었다.
"여태껏 사르칸의 긴 역사 속에서 여인이, 그것도 타국 출신의 공주가 금막관의 황금 잔을 쥔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며, 저는 그토록 무거운 권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디 그 제안은 거두어 주십시오."
제나가 분명한 거절의 뜻을 밝히며 부담감에 물러서려 했지만, 제논은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여유롭게 웃었다.
"오만했던 갈색 벤시가 피를 토하며 죽은 이후로, 내 뜻에 반기를 들 만큼 배짱 있는 귀족들은 이 궁성에 남아있지 않소. 게다가 당신이 고안했던 수문 공개 입찰제 덕분에, 콧대 높던 왼막관과 상인 연합들마저 스스로 분열하여 왕실에 막대한 금화를 바치고 엎드린 상황이지 않소. 지금 사르칸의 왕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나를 견제할 자는 아무도 없소."
제논의 서늘한 눈빛 속에 제나를 향한 지독한 소유욕과 애정이 끈적하게 녹아들었다.
"또한 엘로한 출신인 당신을 대륙 최고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신앙 문제로 국교가 위태로워진 엘로한 황실을 달래고 동맹을 굳건히 하는 가장 훌륭한 외교적 묘수가 될 것이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여인을, 그 어떤 썩어빠진 막관들의 견제도 닿지 않는 내 곁에 영원히 두고자 함이오. 그러니 제발 내 곁에서 그 잔을 쥐어 주시오, 제나."
제논의 재차 이어진 간곡하고도 맹목적인 요청에, 제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도 파격적이고 무거운 권력이었기에 덜컥 겁이 났지만, 찬탈자와 볼모라는 핏빛 운명을 뛰어넘어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깊은 유대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논의 짙은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결국 애써 부담감을 억누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마지못해 그 무거운 황금 잔을 쥐겠습니다."
제나의 억지스러운 허락이 떨어지자 제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침상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사랑하오, 나의 금막관."
"저 역시 은애합니다, 전하."
사르칸의 거대한 옥좌를 지탱할 굵직한 권력의 향방이 정해진 밤. 얽혀드는 두 사람의 숨결과 짙은 사랑의 밀어는 촛불이 타들어 가는 늦은 밤까지 쉴 새 없이 침소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