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하고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엘로한의 변방, 에메랄드빛 오아시스와 매캐한 화산재가 공존하는 모래 자매단의 비밀스러운 요람 시쿠미에 사원.
평화롭게 영력 수련이 이어지던 사원의 앞마당에, 거친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다급하게 들이닥쳤다.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붉은 실크 로브를 펄럭이며 내린 여인, 바로 모래 자매단의 대모(大母)이자 엘로한 황실의 조언자인 시스터 엥가였다.
평소 황성의 젊은 근위병들을 희롱하며 여유롭고 오만하게 굴던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 짙은 초조함과 낭패감이 역력하게 서려 있었다.
얼마 전, 태양 올리 왕자의 집무실에서 그의 내면을 훔쳐보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힘에 영력을 철저히 가로막힌 데다, 도리어 자신의 문란한 행각을 대조모인 시스터 헬가에게 폭로하겠다는 치명적인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엥가는 올리의 입을 막을 방도를 찾고 헬가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쫓기듯 황성을 빠져나와 이곳 본원까지 도망쳐 온 참이었다.
"엥가 대모님, 먼 길을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사원의 책임 자매인 시스터 카샤가 수련생들을 물리고 정중하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카샤는 속으로 엥가의 세속적이고 타락한 행실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사원의 책임자로서 대모를 향한 깍듯한 존중과 예우를 다했다.
"비켜라, 카샤. 잔말 할 시간 없다. 당장 시스터 헬가 대조모님을 뵈어야겠다."
엥가가 다급하게 카샤를 밀치며 사원 깊은 곳의 성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카샤가 흔들림 없는 태도로 그녀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송구하오나 대모님. 대조모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뭐라고? 시스터 헬가께서 사원을 비우셨단 말이냐?"
"예. 이미 한 달 전, 사르칸 쪽으로 기약 없는 순례를 떠나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카샤의 대답에 엥가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우뚝 멈춰 섰다.
자신을 지켜줄, 혹은 자신이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유일한 뒷배인 헬가가 사막으로 사라졌다. 올리 왕자가 언제 황제에게 자신의 치부를 까발릴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완벽하게 퇴로가 끊긴 셈이었다.
"아악-!"
극도의 불안감과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한 순간, 엥가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이성을 잃고 통제하지 못한 엄청나게 거대하고 날카로운 '영력(靈力)'이 사방으로 맹렬하게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쿠구구궁!
사원의 무거운 석조 기둥들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오아시스의 수면이 기괴하게 요동쳤다. 사원 마당에 있던 젊은 수련생들은 그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영력의 무게에 짓눌려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숨통을 쥐어짜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에 수련생들은 코피를 흘리며 덜덜 떨었다.
사원의 책임 자매인 시스터 카샤 역시 엥가의 신경질 적인 기운에 짓눌려 미간을 찌푸렸다. 대모의 무차별적인 폭주가 몹시 버거운 듯 카샤의 매끄러운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지만, 그녀는 즉각 자신의 체내에서 높은 영력을 끌어올려 단단한 방어막을 쳐냈다. 카샤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고 스스로를 완벽하게 방어해 내며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헉… 헉… 이 망할 놈의 수작질… 기어이 나를 벼랑 끝으로…!"
엥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헐떡이던 그때였다.
그녀의 서늘한 시선 끝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질적인 풍경 하나가 들어왔다.
수십 명의 수련생이 영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을 기며 고통스러워하는 그 생지옥의 한가운데. 오직 조막만 한 얼굴을 가진 가녀린 체구의 수련생 하나만이, 무릎조차 굽히지 않은 채 멀쩡히 서서 빗자루를 쥐고 엥가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스터 헤라였다.
엥가가 뿜어내는 그 엄청난 영력이, 마치 헤라의 몸에 닿기 직전 투명하고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힌 듯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부드럽게 비껴가고 있었다. 오히려 엥가의 힘을 가볍게 튕겨내는 그녀 특유의 무의식적인 강제 통제력이 주변의 공기를 일렁이게 만들 정도였다.
'저 맹렬한 힘은 대체 뭐지?'
당황한 엥가가 홀린 듯 헤라의 앞까지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헤라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엥가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변방의 사원에 틀어박힌 일개 수련생이 저토록 상상을 초월하는 영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엥가는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 마른침을 삼켰다. 대모인 자신의 폭주를 아무런 영창이나 방어기제 없이 그저 숨 쉬듯 튕겨내는 이질적이고도 압도적인 힘. 헬가 대조모가 세상의 눈을 피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몰래 숨겨두고 길러온 이 괴물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악한 엥가는 본능적으로 기민한 짐작을 굴리기 시작했다.
순간, 절망에 빠져 있던 엥가의 입가에 비릿하고도 환희에 찬 짙은 미소가 기괴하게 번져갔다. 올리 왕자의 협박으로 모든 것을 잃을 위기라 생각했는데, 이 짐작조차 가지 않는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지닌 수련생을 자신의 손으로 쥐고 흔들 수만 있다면, 올리 왕자의 건방진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권력을 발밑에 두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엥가는 꿇었던 무릎을 펴며, 빗자루를 꼭 쥐고 있는 헤라의 턱을 붉고 긴 손톱으로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헤라는 대모의 억압적인 손길과 기운 앞에서도 흠칫하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훗날 엥가를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거대한 영력을 내면에 품고 있는 그녀에게, 엥가의 날 선 위압감 따위는 본능적으로 조금도 두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영문 모를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엥가를 마주 볼 뿐이었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거대한 힘을 가졌구나, 작은 자매여."
엥가의 뱀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엥가는 동요조차 없는 헤라의 어깨를 꽉 쥐며 몹시 의미심장하고도 은밀한 속삭임을 남겼다.
"이 척박한 화산재 속에 조용히 파묻혀 살기엔, 네 안에 잠든 그 무시무시한 영력이 너무도 찬란하고 아깝구나. 그래… 어쩌면 네가, 이 벼랑 끝에 선 나의 아주 새롭고 훌륭한 구원줄이 되어줄지도 모르겠어."
자신의 거대한 힘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빗자루를 쥐고 선 가녀린 수련생과, 그 괴물 같은 잠재력을 이용해 다시 한번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는 타락한 대모. 엘로한의 뜨거운 태양 아래, 또 다른 핏빛 모략과 기회의 톱니바퀴가 시쿠미에 사원의 맑은 오아시스 수면 위로 기분 나쁜 파동을 일으키며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
며칠 후, 엘로한의 뜨거운 태양 아래, 시쿠미에 사원의 평화로운 오후.
모래 자매단의 대모(大母) 시스터 엥가는 그늘진 회랑의 기둥에 기대어 선 채, 앞마당에서 조용히 빗자루질을 하는 시스터 헤라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엥가는 올리 왕자의 협박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 절망적인 순간에 발견한 헤라의 압도적인 영력은, 엥가에게 다시 한번 엘로한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완벽한 '도구'이자 구원줄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사원에서 헤라를 곁에 두고 지켜보며, 엥가의 내면에서는 기묘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헤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힘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과시하거나 남을 짓누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맑고 고요한 눈동자로 사원의 허드렛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대모인 자신이 내뿜는 날 선 위압감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아부하지 않는 그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엥가는 가슴 한구석이 날카롭게 찔리는 듯한 기묘한 통증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 엥가 역시 헤라처럼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겠다는 순수한 열망만을 품고 땀 흘리던 맑은 수련생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재능으로 대모의 자리에 올라 엘로한 황실의 조언자로 파견된 순간, 그녀가 마주한 세상은 사원의 깨끗한 모래알과는 달랐다.
황성의 귀족들과 상인들은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속으로는 탐욕에 미쳐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하이에나 떼와 같았다. 그 아귀다툼 속에서 자매단의 권위와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엥가는 스스로 독사가 되어야만 했다. 영력으로 그들의 약점을 캐내어 협박하고, 세속적인 쾌락과 공포를 무기 삼아 황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렇게 진흙탕을 뒹굴며 살아남은 대가로 그녀는 절대적인 권력을 쥐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영혼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황성의 모리배들처럼 지독하게 찌들어 버렸던 것이다.
"……."
엥가는 한숨을 내쉬며 헤라에게 다가갔다. 세속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헤라의 맑은 영력을 곁에서 마주하자, 엥가의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수도자'로서의 순수한 경외감이 오랜만에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황실을 협박할 무기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8세기 전 신을 버리고 인간의 한계를 증명하고자 했던 모래 자매단의 이념을 완벽하게 완성해 낼 '진정한 미래'였다.
"헤라. 빗자루는 그만 내려놓거라."
엥가의 부드러운 부름에 헤라가 고개를 들었다.
"대모님."
"나를 따라오렴. 네게 보여줄 곳이 있다."
엥가가 다정하게 헤라의 작은 손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늘 콧대 높고 신경질적이던 대모가 일개 수련생의 손을 직접 이끄는 파격적인 모습에, 수련장에 있던 다른 시스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대모님께서 직접 헤라를 데리고 가시잖아?"
헤라의 절친한 동기인 텔가를 비롯한 주변의 수련생들은 숨을 죽인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영력을 품고 대모의 이례적인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동기를 향한 순수한 경외와 동경의 시선들이었다.
엥가는 수련생들의 경이로운 시선을 뒤로하고, 헤라를 이끌어 사원 가장 깊은 곳에 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흑요석 문을 열었다.
"이곳은 시쿠미에 사원의 진정한 성소이자, 가장 깊은 요람이란다."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헤라의 입에서 절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화산의 깊은 심장부와 맞닿은 그곳은 외부의 투박한 사막 풍경과는 전혀 다른 장엄한 세계였다. 용암이 식어 만들어진 거대한 현무암 기둥들이 수십 미터 높이로 뻗어 거대한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암벽의 틈새로는 에메랄드빛 오아시스의 수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신비로운 안개를 피워 올렸다. 벽면을 따라 일렁이는 푸른 이끼의 빛무리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성소의 웅장함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엥가는 벽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거대한 부조들을 어루만지며, 몹시 경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대홍수의 재앙을 비껴간 엘로한의 핏줄들이다. 8세기 전, 맹목적으로 신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던 구시대의 나약함을 거부한 우리의 선조들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이곳 화산 아래에 자매단을 세웠지. 남성의 육체적 힘이 아닌, 오직 여성만이 닿을 수 있는 섬세하고도 초월적인 영력의 정점을 향해서 말이다."
엥가의 시선이 맑은 눈망울로 부조를 올려다보는 헤라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네 안에 잠든 그 맹렬한 불꽃은, 우리 자매단이 8세기에 걸쳐 찾아 헤매던 그 궁극의 답일지도 모른단다."
세속에 찌들었던 엥가의 눈동자에 어느새 순수한 열망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헤라의 손을 이끌고 성소의 가장 깊숙한 중심, 신비로운 빛이 내리쬐는 작은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 제단 위에는 기묘한 형태의 묵직한 막대 하나가 공중에 뜬 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어떤 쇳덩어리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매끄럽고 기하학적인 금속 재질의 막대. 그것은 10세기 전, 대홍수로부터 세상을 구원한 전설적인 관찰자가 남긴 유물이자 모래 자매단이 비밀리에 보관해 온 성물, ‘약속의 막대’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엥가가 조용히 묻자, 헤라는 홀린 듯 막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나 쥘 수 없는 고대의 유물이란다."
엥가가 허공에 뜬 막대를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물리적인 힘이나 얄팍한 영력 따위로는 결코 이 막대를 억지로 움직일 수 없어. 오직 예언된 단 한 사람… 그 진짜 주인의 고유하고 고귀한 기운과 완벽하게 공명할 때에만 스스로 잠든 힘을 깨우는 기적의 성물이지."
영력으로 자물쇠를 부수거나 억지로 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주인의 영혼과 핏줄을 기억하고 반응하도록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이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유물이었다.
"대조모께서는 언젠가 이 약속의 막대를 쥐어야 할 진정한 주인이 나타날 것이라 하셨다. 네가 우리 자매단의 미래가 되어준다면, 언젠가 저 막대가 깨어나는 기적의 순간을 네 눈으로 직접 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자신의 핏줄조차 잊어버린 가녀린 수련생 헤라, 그리고 그녀의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다시금 자매단의 긍지를 되찾기 시작한 엥가.
웅장한 화산의 심장부에서, 엥가는 부드러운 손길로 헤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먼 훗날 잃어버린 기억을 안고 찾아올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다리며, '약속의 막대'는 고요한 에메랄드빛 안개 속에서 기이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