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칸의 비옥한 흑토와 붉은 강물이 굽이치는 거대한 궁성 앞, 유르가드의 굳건한 영주 서리 말론을 맞이하는 거대한 환영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맹렬한 눈보라를 뚫고 바다를 건너온 말론은, 자신을 호위하는 북부의 정예 기사들로 구성된 일행을 이끌고 묵직하고 위압적인 발걸음으로 핏빛 궁성의 중심에 들어섰다. 화려한 붉은 카펫이 깔린 알현실 한가운데서, 말론의 날카로운 시선이 옥좌를 향했다.
그곳에는 사르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노을 제논과 함께, 새롭게 대륙 최고의 권력인 금막관(金幕官)의 자리에 오른 태양 제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를 마주한 순간, 늙고 노련한 말론조차 당황한 기색을 완벽히 숨기지는 못했다. 사르칸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여성이 금막관의 황금 잔을 쥔 전례가 없었을뿐더러, 그녀가 어두운 피부를 지닌 엘로한 출신의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왕의 핏줄이 섞인 친척만이 추대되던 그 신성한 자리에 타국 출신의 이방인 여성이 서 있는 이질적인 풍경.
하지만 말론은 이내 서늘한 눈빛을 가라앉히며 상황을 명확히 꿰뚫어 보았다. 위태로운 국교를 맺고 있는 엘로한과의 외교적 우호를 다지고, 오만한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르며 왕권을 강화하려는 제논의 치밀하고도 소름 끼치는 정치적 계산이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말론을 환영하는 거창하고 위압적인 의식이 끝난 뒤, 궁성의 화려한 홀에서는 기사들과 귀족들을 위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연회의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장내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새로운 금막관 태양 제나를 위한 정식 '신발잔' 의식이 거행되었다. 제논이 직접 왕의 신발 모양을 딴 눈부신 황금 잔에 진귀한 붉은 포도주를 가득 따랐고, 제나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그 잔을 받아 마시며 사르칸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신발 모양의 브로치를 가슴에 달았다.
한바탕 소란스럽고도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던 축제가 끝나고 밤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던 말론은 고요한 회랑에서 짙은 회색 사제복을 입은 사내와 마주쳤다. 교단을 무력으로 짓밟은 찬탈자의 밑에서 새롭게 대성언관의 자리에 오른 브라더 이립이었다.
겉으로는 깊은 주름과 한없이 자애로운 성직자의 얼굴을 한 이립이었지만, 그는 말론의 곁으로 다가와 몹시 은밀하고도 뱀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영주님. 새롭게 금막관에 오르신 태양 제나 공주를 뵈니 어떠하셨습니까."
이립의 은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기묘하게 번뜩였다.
"엘로한의 태양 왕조는 대대로 맹렬한 모래사막의 태양을 빼닮은 노란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나는 법이지요. 허나 오늘 황금 잔을 쥔 저 여인의 눈동자에는 그 고귀한 노란빛이 없더군요."
이립은 주변을 살피며 한 걸음 더 다가와 뼈 있는 정보를 흘렸다.
"게다가 같은 흑인이라 한들, 태양 황실의 핏줄은 과거 사막 깊은 곳을 유랑하던 고대 유목 부족의 피가 짙게 섞여 있어 머릿결부터가 다릅니다. 거칠고 뻣뻣한 보통의 머리칼이 아니라, 마치 물결처럼 윤기 나게 굽슬거리는 특유의 머릿결을 지니고 있지요. 헌데 저 여인의 외양은 어딘가 조잡하게 꾸며낸 모조품 같지 않으셨습니까."
이립의 은밀한 속삭임에, 말론의 묵직한 두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말론은 아주 오래전, 젊은 시절 외교 사절로서 우측 대륙 엘로한의 눈부신 황성을 직접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엘로한 황실 핏줄들의 압도적인 외양.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나던 선명한 노란 눈동자와 특유의 굽슬거리는 흑발이 말론의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대사원 학살극과 파도 요한의 참혹한 죽음, 그리고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은 유론의 흑막까지. 이미 썩어빠질 대로 썩어버린 사르칸 왕실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말론은, 이립이 건넨 이 치명적인 정보를 몹시 깊게 받아들였다. 말론은 제논의 반역뿐만 아니라, 옥좌 곁에 선 저 가짜 여자의 진짜 정체와 그 배후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를 제 두 눈으로 낱낱이 파헤쳐보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
말론이 무거운 상념을 안고 촛불이 일렁이는 처소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두운 방 안에는 뜻밖의 불청객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 제논이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늦은 시간에 찾아와 미안하오, 서리 영주."
제논이 서늘하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늙은 늑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몹시도 파격적이고 무거운 제안을 입에 올렸다.
"갈색 벤시의 빈자리. 사르칸 제일의 무력과 왕실 군대를 통솔하는 무관의 정점이자, 나의 굳건한 우측 날개인 '오른막관(右幕官)'의 자리에… 서리 말론, 바로 당신을 앉히고 싶소."
"참 웃기지 않소. 전하의 창부 어미는 그렇게도 궁전에 들어오고 싶어 했는데. 그런 여자의 아들이 감히 서리 가문의 영주에게 선심 쓰듯 손을 내미는 이 상황 말이오."
말론의 묵직하고도 신랄한 일갈이 어두운 처소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제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창부 어미'. 그 단어는 제논의 뼛속 깊이 각인된 지독한 열등감이자, 이 궁성에서 감히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절대적인 역린이었다. 뒷짐을 진 제논의 엄지손톱이 제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맺혔다.
하지만 제논은 턱관절이 도드라지도록 이를 악물다 이내 서늘하고도 오만한 실소를 터뜨렸다. 비천한 과거를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것을 무기 삼아 맞받아치는 맹수의 반격이었다.
"과인의 어머니가 가장 밑바닥의 창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허나 똑똑히 보시오, 서리 영주."
제논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맹렬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말론을 쏘아보았다.
"그 천한 창부의 아들은 스스로 피를 뒤집어쓰고 기어이 이 거대한 사르칸의 붉은 옥좌를 차지했소. 헌데 뼈대 깊고 고귀하신 서리 가문의 영주께서는 그 잘난 명예나 부둥켜안고 무엇을 하셨소? 친척인 파도 요한 공의 목이 떨어져 나갈 때도, 척박한 눈밭에 처박혀 무기력하게 얼어가고 있지 않았소."
말론의 두꺼운 미간이 흉폭하게 일그러졌다. 평생을 명예와 전장 속에서 살아온 늙은 늑대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었다.
"이 입을 찢어버릴 찬탈자 놈이…!"
스르릉-!
말론의 굳은살 박인 거친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거대한 북부 검의 칼집을 틀어쥐었다.
동시에 제논 역시 지지 않고 서늘한 눈빛을 뿜어내며 제 허리춤의 화려한 장검 칼집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촛불이 일렁이는 좁은 처소 안, 두 맹수가 금방이라도 서로의 숨통을 끊어버릴 듯 팽팽하게 칼집을 틀어쥔 채 맹렬한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검을 틀어쥔 두 사람의 무게감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말론의 매서운 눈썰미는 찰나의 순간 제논의 빈틈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의 검을 틀어쥔 제논의 하얀 손과 경직된 어깨. 그것은 온실 같은 궁성 안에서 정형화된 검술 교본이나 휘적거리며 자라난 반쪽짜리의 자세였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짐승과 망자들의 목을 수없이 베어 넘긴 북부의 실전 전사를 상대로, 저런 곱게 자란 핏줄이 검으로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내 검이 칼집을 빠져나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저 찬탈자 놈이 검을 채 뽑기도 전에, 단 일격에 목통을 쳐 낼 수 있다.'
말론의 눈동자에 짙은 살의가 맺혔다. 썩어빠진 사르칸의 흑막이고 나발이고, 이 좁은 방에서 단숨에 폭군의 목을 쳐 모든 비극을 끝내버리겠다고 마음먹은 말론이 검자루에 맹렬한 악력을 쥐어 짜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뽑아 보시오."
제논이 칼집을 쥔 손에 힘을 풀며, 서늘하고도 여유로운 목소리로 정적을 갈랐다.
"허나 당신의 그 잘난 검이 과인의 목을 치는 순간, 유르가드로 향하는 붉은 강의 수문과 모든 국경의 식량 보급로 역시 영원히 끊길 거요."
검을 뽑으려던 말론의 손목이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당신은 북부의 제일검일지 몰라도, 동시에 영지를 먹여 살려야 할 영주이기도 하지. 생각해 보시오. 당신의 그 알량한 분노와 긍지 하나를 세우자고, 일 년의 절반 이상이 눈보라에 파묻히는 유르가드의 백성들을 몽땅 굶겨 죽일 작정이오? 눈밭에서 나무껍질을 파먹다 얼어 죽어갈 당신 영지의 핏덩이들을 생각하란 말이오."
단칼에 목을 치려던 늙은 늑대의 맹렬한 기백이, 제논이 뱉어낸 무겁고도 완벽한 실리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제논은 검을 섞지 않고도, 그저 유르가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흔드는 혓바닥 하나만으로 전장 경험이 전무한 자신의 무력적 열세를 완벽하게 뒤집어버린 것이다. 소름 끼치도록 영리하고 잔혹한 제왕의 통제력이었다.
무거운 정적이 처소를 맴돌았다. 말론은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고르며, 제논의 꿰뚫어 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을 마주했다.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백성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판을 지배하는 사내. 말론은 검자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참담한 패배감을 억눌러야만 했다. 제논의 말대로였다. 전사로서 찬탈자의 목을 칠 수는 있어도, 영주로서 영지민들의 목숨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옥좌 곁에 선 저 이질적인 공주의 수수께끼를 비롯해 이 썩어빠진 궁성의 거대한 거짓을 파헤치려면, 어차피 분노를 삼키고 저 자가 내미는 권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만 했다.
스르륵.
결국 말론의 거친 손이 쥐고 있던 검자루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철저한 정치적 계산과 현실의 무게 앞에, 북부의 늙은 늑대가 어쩔 수 없이 찬탈자의 목줄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전하의 혓바닥이 내 검보다 한 수 위로군."
말론이 턱관절을 으드득 씹으며 참담하고도 묵직한 항복을 선언했다.
"좋소. 전하께서 내미는 그 오른막관의 자리… 내 유르가드의 백성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말론의 마지못한 승낙에 제논의 입가에 마침내 짙은 만족감의 비소가 번졌다.
"허나 명심하시오, 전하. 나는 결코 전하의 옥좌를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방패로 쓰듯, 나 역시 내 가족과 유르가드의 안위를 위해 전하의 권력을 철저하게 쥐고 흔들 뿐이오."
"그거 참 든든하군."
제논은 지지 않는 늙은 늑대의 기백에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
"내일 어전 회의에서 뵙지요, 사르칸의 새로운 오른막관."
군더더기 없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처소의 문을 열고 나서는 제논. 그리고 그의 꼿꼿한 뒷모습을 서늘하게 노려보는 말론.
비천한 과거를 딛고 대륙의 정점에 서려는 젊은 왕과, 그가 내민 무거운 권력을 쥐고 왕실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파헤치려는 북부의 늙은 늑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두 맹수의 아슬아슬하고도 치명적인 동거가 핏빛 궁성의 심장부에서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