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월급쟁이가 되고 싶었을 뿐

객기의 대가, 이력서 한 줄의 무게

by 한도톰

까맣게 묵혀두었던 파일창을 열었다.

몇 년 전의 내가, 거기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시험 삼아 넣었던 의류회사 MD 자기소개서도 함께 .

그 때의 나는, 주류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잘만 활용하면 꽤 완성도 높은 이력서를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전에 필요한 건 공인 영어점수였다.

주류에 휩쓸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20대 초반의 객기가

주류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는 나에게 후회라는 명목으로 고스란히 돌아올 줄이야.

무슨 겉멋이 들어 송곳을 자처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를 알뜰살뜰 챙겨주던 언니와 함께 토익과 오픽을 준비했다.

다들 취업준비에 뛰어들 당시 친구가 너는 토익 준비 안 하냐는 물음에,

"그런 거 준비해서 뭐 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뭐라도 있어야 취업 문턱을 겨우 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이 더해진 까닭이었는지

현재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비교되었다. 그래서 더 후회가 커졌는지도.


어영부영 토익과 오픽점수도 취업 커트라인에 맞추고, OS관련 자격증도 갖추었다.

도움이라도 될까 유통관리사도 손을 대었다.

이제 겨우, 취업을 준비할 수 있는 자격이 얼추 마련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행정조교는 꿀직무가 맞았다.

들어오는 일을 처리하면서도, 월급 받으면서 제 할 일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이지 취준생에겐 이만하게 적합한 자리가 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자리를 열심히 활용하며 하고 싶은 직무와 기업 대상으로 마음껏 이력서를 뿌려댔다.


"나 좀 보시오.

제가 이렇게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올시다."


하지만 그 누가 진심을 알아줄까?


그들이 알아봐 주는 건 진심이 아니라 스펙이었다. 스펙이 곧 경험이었고, 직무에 대한 진심도였다.

그 시선값에 나의 이력서는 초라하기 그저 없었다.

직무에 상관도 없는 작곡과에, 이도저도 아닌 경제학부.

자신감 있게 들이밀 수 있는 건 학점밖에 없었지만, 취준생 풍문에는 학점 높은 사람은 공부만 했기에 일머리가 안 좋을 수 있으니 불합격시킨다는 카더라도 돌았다. 그래서 관련 경험이라도 비벼볼까 했지만, 카페 아르바이트와 학생회 경험은 정성평가일 뿐 정량평가에 속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 시장은 이력서 첫 페이지의 '한 줄'을 갖고 그 사람의 역량을 논하는 그러한 환경이었다.


1차까지 합격한 게 다행일정도였다.

그 이외는 모두 서류에서 탈락이었다.

이제는 감까지 왔다. 메일 제목만 읽어도, 문자로 합격발표 안내 글자만 봐도 '아 탈락이구나'를 알았으니까.


자신감이 떨어졌을까?

의외로 떨어지진 않았다. 한 번 우울을 깊게 찍고 일어나서 그랬는지 몰라도, 타격감은 크게 없었다.

내 업보였고, 내 과거에 대한 결괏값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연민 가질 시간에 계발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변 조교선생님들이 취업을 하면서 나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재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여기서 1년을 더 계약하면, 영원한 취준생으로 남겨질 것만 같았다. 이 편안한 삶에 안주하면 안 되었다.


하반기 채용공고가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2개의 대기업에서 특정 직무의 공고가 내려왔다. 매장관리직이었다.

이거다, 싶었다. 정기공고가 아닌 특정 직무 공고라면,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업무 스케줄? 조건? 연봉?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취준생'을 벗어나 '행정조교'로써의 무능력감을 탈피하여 '주류 월급쟁이'가 될 수 있다면.


결과는 감사하게도 두 곳 모두 합격했다.

심지어 한 곳은 최종면접을 볼 때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말을 아꼈는데,

나에게 더 어필해 보라며 기회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특별하고 싶었고, 지금까지 노력한 값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네임밸류가 조금 더 높고 계열사가 많은 곳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참 설렜다.

아주 절망스러우란 법은 없구나. 이 정도 스펙에 그 정도 결괏값이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교도 계약시점에 맞추어 종료되고, 그다음 주에 바로 출근이니 시기도 아주 적절했다.


행정일에는 재능이 없어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매장관리는 한 번 경험을 해 보았으니 충분히 효능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딱 이 시기에 OT를 들었던 때, 그 감정이 생생하다.

차가운 공기가 땅 속에 숨고 포근한 내음이 공기를 아우를 때,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본인의 옷가지를 벗겨내며 봄맞이를 하고 있었던 딱 요맘때쯤.

열심히 승진해서 본사지부까지 가고자 했던 당시의 나의 마음이, 한편에서 아직까지 간지럼을 태운다.


봄처럼 술술 풀릴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으로 결정한 불안의 대가는,

20대 초반 객기의 대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액셀을 잘 밟았다고 생각했는데,

핸들을 쥔 마음은 방향을 몰랐다.


그래서, 속도를 냈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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