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연습

행성 하나가 또 하나의 궤도를 찾기까지

by 한도톰

꽤 나의 우울은 깊었다.

심해에서만 지내느라 몰랐던 것뿐이었다.

잠시 수면 위로 올라가면 심해의 공기와 숨 쉬는 방법이 익숙해서 오는 어색함 때문에,

우울이 덮치는 심해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이 익숙함이 곧 나의 본질이자 편안함이라고 속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가미는 오래 버틸 리 없었고

사람은 육지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동물이었다.


설령 나의 본질이 고요한 바다 속이라고 할지언정,

그 바다는 고요함을 가장한 진공상태였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약을 권유하였지만,

도저히 약을 복용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 정도 우울주기와 기간은 급성적 우울이라기보다 만성적인 우울이니

우울감이 없는 시간을 경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주셨다.


조용히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중간중간 공허했던 때가 있었던 듯했다.

또는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나를 깊은 바닷속에 가두었던 적이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어쨌든 살아가야 하기에 그것이 내 기질이자 본성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물질을 했다.

이건 나의 바다야, 내가 헤엄 칠 수 있어, 이만큼 통제가 가능해.


흔히 감성이 민감한 사람이 느끼는 예민함이라고 치부했던 무언가는

무기력과 무가치함에서 오는 감정이라고 '명명'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꼬인 매듭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순한 성취감과 효능감을 못 느꼈기에 오는 무기력감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으로 여겨질 때 더 이상 나의 역할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역할을 해야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역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물질.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되어야 했고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당히 남들보다 뒤지지 않는 직업과 특별한 기술을 지녀야 했다.

그게 마침 5살 때부터 신동이라고 추앙받으며 배웠던 피아노였고,

피아노는 음악적 관심으로 이어져 작곡과까지 진학하게 만든 동력이었던 셈이었다.

그 동력도, 기술도 잃어버리니 '무언가'는 사라졌고

무엇이라도 해 보려고 뛰어든 분야는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것이 나에게 우울을 가져다주었다.


흔한 과정이다.

세상은 태양이 아니라 우주임을 깨닫는, 아주 흔한 과정이다.

태양만 잘 돌면 되는 행성인 줄 알았는데,

나는 수많은 행성 중 하나였고 태양도 우주의 일부분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됨을 받아들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했다.

나의 부족한 점도, 나의 긍정적인 면모도 모두 내 모습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숨 가쁨도, 과호흡으로 인해 갑작스레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경험도 사그라들었다.

작곡을 배우던 시절 당시 딥한 감정에서 써 내렸던 곡을 들었을 때 굉장히 생소하게 들릴 만큼

감정의 폭과 결도 많이 러프 해졌다.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잘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업무에서 그러한 피드백으로 인해 배제당한다면 다시 잘하면 될 일이었다.

싹싹하지 못했다면 진정성 있는 말 세 마디를 건네보면 될 일이었다.


때 마침 자리를 대체하여 들어온 조교언니는 굉장한 친화력의 소유자였고,

그 언니는 나를 간택(?)하여 여기저기 데리고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성격이 정반대여서 잘 맞았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놀러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취업을 위해 같이 노력하는 메이트도 되었다.

행정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거나 사회생활 속 어색한 부분이 보인다면 기분 나쁘지 않게 조언도 해줬다.

나 역시 그 언니의 친화력을 롤모델 삼아 부단히 사회적 감각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상담도 상담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행동도 나를 많이 변화시켰다.


그래서 찾았던 나의 장점,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사람의 흐름을 읽고, 공간을 정돈하는 일.

매장관리.

싹싹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사람과 대화할 때 니즈를 맞추는데 자신 있었고

무언가를 관리하고 기획하는 것에는 어디 가서 뒤지진 않았다.


20대 중반, 제2의 진로 목표가 생긴 나는

다시 반짝이는 작은 빛을 가진 행성으로,

나만의 궤도를 그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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