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을 잃은 스물넷, 상담실 문 앞에 처음 서 있었던 때.
당시 취업을 위한 기본 필수템은 아래와 같았다.
토익점수, 컴활자격증, 기타 아르바이트 경험과 약간의 대외활동 등.
나에게 대외활동이라고는 남들 다 한다던 학생회 밖에 없었고,
아르바이트 경험이라고는 6개월짜리 카페 경험이었으며,
토익점수는 졸업점수에 맞추고자 겨우 취득했기에 써 봤자 무용지물.
컴활자격증은 딱 1개 정도 있었다.
휴학 1년에 방학 8번을 보낸 대학인의 삶 치고,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당시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10대 때 내가 생각했던 20대는 싱어송라이터였고,
20대 초반 때 내가 생각했던 직업은 작곡 분야로 취업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 작곡 분야로 취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했고 자격증이나 영어점수는 그다음 같아 보였다.
당시 사회 주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어딘가 삐딱한 청소년기 마인드, 그 자신감.
그 자신감은 곧 준비하지 않은 객기로 이어졌고 마음껏 부렸던 결괏값은 처절했다
결과라도 좋았으면 미담이었으련만 그 작곡마저 포기하니,
정말 내 손에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4년의 시간을 그냥 날린 것만 같았다.
'시간사치'
나는 아직도 나의 대학 시절을 저렇게 규명하곤 한다.
물론 내가 대학 4학년 말미에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고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본 전공 교수님과 복수전공 교수님이 나에게'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던 때가 있었는데,
복수전공 교수님은 지나가는 말로 음악치료가 어떻냐고 권유했었고 본 전공 교수님은 진심을 다하여 관련 대학원 진학이 어떠한지 끈질기게 설득하셨다.
네가 여기서 그냥 졸업하면 그저 씨앗으로 남는 것이고, 더 배우면 나무가 된다나 어쩐대나.
하지만 당시 나는 배움보다는 경제적인 독립과 제대로 된 직업을 갖는 것이 먼저였기에 수 차례를 고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차피 대학원 갈 거 왜 거절했나 싶다)
그래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취업 프로그램에 가입하여 면접 연습도 하고, 자기소개서도 작성하고, 실제로 넣어보기도 했으나 경상학부도, 예술학부도 아닌 어딘가 어정쩡한 나의 위치는 취업 현실에서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자기소개서에나 면접에서나 경력 면에서나 여실히 드러났다. 삶의 방향성이 없고, 원하는 바가 없는 진로미아의 마음이.
미아는 미이더라도 넋 놓고 황당하여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뭐라도 경력을 쌓고,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돈이라도 벌어보자라는 생각에 지원한 '대학 행정조교'
다른 동기들은 경상학부와 관련한 사무직이나 기업에 취직하여 본인의 전문적인 기반을 닦는데,
나는 이제야 내가 맞는 직업을 찾겠다고 예열을 달구고 있으니 늘 '이게 맞나?'에 대한 질문이 가득했다.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기에
나를 좋게 본 교수님이 학부장으로 계시는 행정실에 지원했고, 합격은 얼추 수월하게 되었다.
그래서 얼레벌레 들어가게 된 조교자리.
그 행정실에는 4명의 조교와 2명의 교직원분이 함께했다.
조교선생님 중에 내가 제일 막내였다.
나처럼 잠시 예열하기 위해 들른 2명의 언니와, 대학원을 다니며 행정조교를 하는 언니 1명.
사회성이 다소 부족하고 싹싹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을 포용해 주던 언니들이라 더 기억에 남았던 걸까?
분명 그 언니들에겐 내가 말도 없고 내성적인 막내였을텐데, 항상 데리고 다니며 어울려주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업무로서 소통하는 사회생활은 완전히 달랐다.
창의적이고 러프한 일, 속도감 있는 일, 동적인 업무, 무언가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일은 자신 있게 잘 하지만
꼼꼼하고 규율적이고, 루틴 한 일이 가득한 정적인 사무직은 나에게 지루하고 지독하게 맞지 않았다.
학점에서도, 학교생활에서도, 아르바이트에서도 일을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는데
이곳에선 내가 '일못러'로 자리 잡혔다.
반복되는 행정적 실수, 교내 행정 절차가 이해되지 않아 발생하는 오해들은 일을 믿고 맡기지 못할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차라리 싹싹하면 나은데, 싹싹하지도 않고 뚱-하게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나의 존재는
꽂아준 학부장만 아니면 해고하기 딱 좋은 그러한 위치였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경험들과 장점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참 미웠어서 우울감에 젖어있을 때도 있었다.
결정적이었던 건, 나보다 늦게 들어온 조교 선생님께 내가 원래 하던 업무를 넘겨주고 '쩌리'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그때 절정을 웃돌았다.
모멸감, 내 역할에 대한 수치심,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파국적 해석이 많은 감정을 낳았고
그 감정은 여러 번 내 온몸을 쑤시고 강타했다.
일이라도 못 하면 싹싹하기라도 해야지,
싹싹하지 못하면 일이라도 잘해야지,
그 어느 장단에도 못 맞추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두 가지 장단도 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사회성도 없고 취업을 해도 실패할 것이라는 상상에 늘 시달렸다.
그 마음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브레이크를 걸면 나아져야 하는 무언가의 압박이 있었다.
차라리 나를 미워하는 방식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그대로 맡겼다.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으며,
못 해내도 솟을 구멍은 있다고 자기 자신을 잘 위로하며 자신이 넘쳤던 내가
무엇이든 해낼 수 없으며
못 해내면 나의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며 학대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우울은 생각보다 깊었고
깊다 못해 출구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바다 깊숙이 빠져들면
숨을 못 쉬어 몸부림치듯이,
그 우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지하철 문이 닫힐 때 소음이 갑자기 크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곧 죽을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심장에 문제가 있나 싶어 대학병원 내과를 두드렸다.
선생님은 검사결과를 얘기하며 정신과를 권유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첫 상담실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