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시작선 옆에서, 끝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
변화란 본디 나의 살을 깎아내리는 작업인지라, 여간 마음을 굳게 먹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나의 것을 꺼내놓을까 말까 고민하는 그들의 옴싹달싹한 입모양은 마치 시작을 위한 준비지점에 서서 요이땅을 외칠까 말까 고민하는 모양새와 비슷하다.
생각보다 상담의 과정은 치열하다. 이야기를 건네는 화자의 현재 마음과 과거의 입장, 그들의 제스처를 통한 비언어적 표현, 그것을 듣는 나의 느끼는 바, 그 느끼는 바가 나의 것인지 내담자에게 제대로 닿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 내가 건네는 말 한 문장이 그에게 어떤 온도로 닿을지까지의 계산이 매 순간 이루어진다. 집중,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위한 문장 선택. 고르고, 또 고른다. 내가 화자가 되어보아 장면을 고스란히 느껴본다. 그래서일까? 상담이 끝난 이후 10분의 쿨링타임과 초콜릿은 필수다.
치열한 무언가가 혼재되어 있는 과정을 거쳐야, 그들의 입모양이 "요이땅"을 외치기 시작한다. 그때를 우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한다. 시작. 그것은 움직여야 할 동기가 생겼다는 의미이자, 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르게는 그 시작의 동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무작정 발을 내딛지 않는다. 목표와 이정표, 그리고 이를 위한 봇짐 하나가 준비가 되면 그때 '가 볼까?'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듬는다.
하지만 봇짐은 늘 가볍지만은 않다. 그리고 항상 단단하지도 않고, 필요한 물건들이 꼭 들어가 있지도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복병이다. 누군가는 지혜롭게 대처한다. 하지만 마음이 낡아진 우리들에게는 그것은 시작의 끝에 불과한 재난 그 이상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변화를 위해 발을 딛기 시작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복병은 우리네 마음에 불안이라는 불을 지핀다. 걷잡을 수 없이 온 마음을 태울 때, 낡아진 마음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의 무릎을 기어코 땅에 닿게 만든다. 걸을 수 없게. 끝을 생각하지 않고 시작을 했으나, 이미 끝을 경험하듯 시작선에 머무른다. 요이땅을 외쳤던 용기가 무색하게도 끝을 경험하게끔 봇짐을 제대로 싸지 못한, 본인을 탓한다.
봇짐이 부족해서도, 덜 챙겨서도 아님을 우리는 안다. 시작의 '끝'이 마침표처럼 느껴질 뿐이다. 시작에 대한 결실은 익숙하나, '끝'은 다시 일어서서 걷기엔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작에는 끝이 있다. 목표를 이뤘다면 그것은 새로운 목표를 위한 끝일뿐이다. 시작선에서 느끼는 끝은 실체가 아니라, 단지 느끼는 '감정'일뿐이다. 그 감정을 진심으로, 본인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실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들의 입모양이 다시 한번 "요이땅"을 외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본다. 외치지 않아도 좋고, 잠시 시작선에 머물러 봇짐을 같이 챙겨도 좋다. 앞으로 가다가 또 끝을 느낄 때, 그곳이 진짜 끝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확인해 보면 되니까. 다시 "요이땅"을 외칠 순간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시작의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