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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카모토 미깡 Jun 22. 2022

감사일기

예고 없이 비가 오던 날 우산을 든 네가 함께 왔어

사랑을 듬뿍 받은 날은 설렘이 가시질 않아 밤이 깊도록 어딘가에 에너지를 쏟은 뒤에야 잠이 들곤 한다. 그런 날엔 잠을 얼마 자지 않아도 가뿐히 일어난다. 어제의 온기가 남은 따뜻한 가슴을 안고, 입가엔 미소를 띤 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사실 오늘의 시작은 그렇지 못했다. 날씨가 우중충한데다 월경 중인 탓에 관절 곳곳이 쑤셨다. 전날에도 하루를 무익하게 보냈다는 자괴감에 빠져 공연히 시간만 뭉개다 꼭두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든 차였다. 오전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느지막이 일어나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식량을 입안에 밀어 넣는다. 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 예정된 일정을 마치면 카페에 가서 공부할 계획이다. 주무르는 시늉을 해봤으나 여전히 딴딴한 어깨 위로 두꺼운 문제집 두 권을 넣어 잔뜩 무게가 실린 가방을 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문으로 걸어 나오는데 지면이 젖어있다. 아, 오늘 비가 오나 보네. 혼자가 된 것이 익숙지 않아 번번이 우산 챙기는 것을 잊는다. 다시 가지러 올라가자니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출발하기로 한다. 다행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라고, 나만 들을 수 있는 음량으로 혼잣말한다. 감사한 것이 있을 때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감사하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최근 들이기 시작한 습관 중 하나다. 정말 별로다 싶은 날도 작은 감사거리를 찾아 하나씩 쌓다 보면, 못해도 ‘최악’이라는 수식어는 면할 수 있다.

공유 자전거를 타고 녹사평 대로를 질러 카페로 향한다. 주에 4일 정도 근무하는 곳이기도 하다. 평일이라 사람도 없을 테고, 직원 복지 차원에서 음료를 얻어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예상대로 매장은 조용했고 공짜 음료를 받은 나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한창 공부하고 있을 즈음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뭐 하고 있어?”

“이태원 카페에서 공부 중이야.”

“그러면 이따가 중고 거래하러 근처 가는데 그 김에 옷 갖다 줄게.”

미니멀리즘에 꽂힌 친구의 옷장은 정리가 한창이다. 새것처럼 멀쩡하지만 그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손이 잘 가지 않는’ 옷들이 정리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 처분 행위의 수혜자라고나 할까. 마침 옷에 돈 쓸 여유가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옷장이 채워지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다. 오늘의 감사거리가 벌써 두 개째다.

“왔어?”

그는 내가 앉은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크림 케이크 하나와 쿠키 두 개가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암만 디저트를 좋아한다지만 혼자 먹을 양이 아니다. 그는 행복한 얼굴로 포크를 집어 드는 한편 너도 얼마든지 먹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고마워.“ 부드러운 캐슈넛 크림과 쿠키 사이사이 박힌 초콜릿이 녹으며 입안 가득 달콤함으로 메운다. 이걸로 세 개째.

이번엔 외부 미팅을 나갔던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식사 안 하셨죠?”

커피를 마시면 속이 더부룩해질 테니 얼렁뚱땅 끼니를 때우려는 심산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걸까. 그는 원두를 납품하는 식당에서 식사하는 김에 겸사겸사, 카페에 눌러앉아 공부하는 내 몫의 음식까지 포장해 왔다. 두툼한 두부 시저 랩과 사이드 샐러드와 파운드케이크 한 조각. 친구와 반씩 나눠 먹었는데도 든든하다.

카페 마감 시간이 되어 집에 가려는데 종일 우중충하던 하늘이 인제야 비를 쏟아낸다. 친구가 가져온 우산 하나를 나눠 쓰며 둘이서 팔짱을 끼고 꼭 붙어 걷는다. 해줄 수 있는 건 너저분한 자취방에서 재워주기 정도밖에 없는 나는 청소를 언제 했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입을 뗀다. 너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어차피 내일 그쪽에서 출근이잖아. 그래도 돼? 그러엄. 그리고 내가 어제 해놓은 감자탕 있어. 아침에 그거 먹고 가. 근데 집이 좀 더러워. 배시시. 새삼스럽다는 듯한 그의 웃음에 나도 덩달아 웃는다.

누군가의 따뜻함이 간절하게 필요한 날이 있다. 그런 날에 나를 혼자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을 듬뿍 받고 나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상처받는 일에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사랑할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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