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교양수업 - 도서「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
최근 생성형 AI의 지브리풍 그림이 화제가 되었다. 유행에 편승해 나도 몇 번인가 이용해 봤다. 챗GPT에게 사진을 준 뒤 지브리풍으로 바꿔 달라고 하면 과연 그럴싸한 그림을 뽑아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던 내 친구는 힘이 많이 빠진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거장들의 작품을 포함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한 생성형 AI의 그림은 기술적인 면에서 월등했다.
대학에 와서 글쓰기 과제를 하면서도 챗GPT를 활용 해봤다. 무조건적 긍정 회로와 과대포장 된 문장이 맘에 안 들었지만, 유려한 표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챗GPT는 학술적이거나 전문성 있어 보이는 고급 어휘를 곧잘 읊었고, 글 속 요소의 볼륨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았다. 이는 내게 부족한 부분이었다. 내 어휘력은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모자라고, 감정이 개입되면 요소별 분량이 과도하게 많거나 적어지며, 때론 글 자체가 흔들리곤 한다.
모델・배우 분야도 위협받고 있다. 생성형 AI의 활용이 증가하면서 모델 일거리가 확연하게 줄었다.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 광고에서 만난 AI는 각자 나름대로 개성 있게 예쁘다. 쟤네는 다이어트하거나 시술 받을 필요도 없겠지.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해 봐도, AI가 제작한 이미지와 실제 인간의 구분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난 예술을 한다면 인간이 예술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뛰어난 예술이란 뭘까? 기술적으로 우월한 것이 가장 훌륭한 예술인가? 인간의 예술이 AI의 예술과 어떤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을까?
내가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감각적인 몰입과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 아주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 피아노 치는 것,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음악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듯 황홀한 감각을 느꼈다. 엄마가 음악과 글쓰기를 좋아하셨다고 하는데, 그 기질을 어느 정도 물려받은 것 같다.
보고 듣기에 좋은 것뿐 아니라 소통의 수단으로서 예술의 기능을 깨달은 건 중학생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지만 말할 데가 없었다. SF소설이 아닌 삶에 대한 불만과 설움을 처음으로 종이 위에 토했던 날에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 글을 남에게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생긴 셈이었다.
그 뒤로 글을 꾸준히 쓰지는 않았다. 음악과 미술 등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한 탐구와 진로 설계는 현실적인 이유로 가로막혔다. 허락된 선택지 안에서 나름 고군분투하다, 우울에 잠식될 때면 종이와 펜을 찾았다. 글쓰기는 다른 예술에 비하면 가성비가 좋은 편이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글 없이는 살 수 없겠다고 느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글을 꾸준히 쓴 건 아니다. 삶이 평화로울 땐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평온한 삶이 위협받을 때, 내 몸과 정신을 현실에 붙들어 놓기 위해 글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의 글은 주로 정서적 혼란 속에서 탄생했다. 정서적으로 조금 안정된 뒤에 읽으면 다소 민망하게 느껴지곤 했지만, 그 속에는 내가 처했던 상황과 그때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겪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문장도 있었다. 그런 문장은, 적어도 글 속 삶을 살아낸 당사자이자 최초의 독자인 나에게 만큼은 커다란 울림을 선사했다.
홀로 예술을 향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과 예술을 매개체로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의 경우 후자다. 이대로 순순히 사라져 주기 싫고, 나의 역사를 알리고 싶다는 표현의 욕구, 나아가 예술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공감과 이해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인정 욕구도 있다. 예술은 나의 비대한 자아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여기에 있는 나를 좀 봐달라는 외침이다. 나에게 있어 예술은 그 자체로 목적이자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은 예술을 통한 자아 실현 욕구는 아직까지 AI에게는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자발적인 창작 동기와 의도를 지닌다는 점에서, 인간의 예술은 AI의 그것과 구별될 수 있다.
예술의 수용 방식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예술을 감상할 때 작가의 배경과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구의 작품인지, 어떤 환경에서 탄생했는지가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AI작품은 아직 이러한 인물적 서사나 삶의 맥락이 결여되어 있어, 예술로서의 감동이나 영향력에 제약이 있다. 동시에 인간 예술은 작가의 윤리성과 연결되어 평가되곤 한다. 아무리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일지라도, 인간의 예술은 작가의 인간성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면이 있다.
교수님이 소개해준 도서 속 ‘혼돈의 모서리’에 관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질서와 혼돈이 교차하는 지점, 즉 적당한 불확실성과 융통성이 있는 상태에서 혁신이 탄생한다는 주장이다. 나의 경우 인생 전반에 걸쳐 안정보다는 혼란의 비율이 높았던 것 같다. 그러한 혼란과 결핍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 짓는 차별점을 낳았다는 점에서, 혼돈의 모서리 이론은 내 삶에도 적용되고 있다고 봐야겠다.
간혹 예술가는 무모한 혼돈의 아이콘으로 표방되곤 한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탄생한 예술이 관객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과 예술가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강의를 들으며 움찔했던 대목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카산드라 콤플렉스에 관한 내용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면서도 근거 없는 낙관이나 회의를 갖는 상태. 꽤 긴 시간 당장의 호기심과 감정 해소에 몰두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보다 길고 안정적인 창작 활동을 위해 우선순위와 질서 세우기에 집중하고 있는 요즘이다.
생성형 AI의 발달로 예술의 기술 겨루기에 큰 의미가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다. AI의 도움으로 기술이 부족한 인간도 예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예술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 대두된다. 인간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을까? 나는 챗 GPT 유료 버전을 사용하고 있지만, 글을 쓸 때 문장 작성을 통째로 맡기지는 않는다. 주로 개요를 작성하거나, 제삼자 피드백이 필요하거나, 제목을 지을 때 활용한다(그리고 글을 보여주고 칭찬을 유도해 인정 욕구를 채우기도 한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쓴 문장이 더 좋다. 나라는 인간의 삶의 맥락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다소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한 내 글이 좋다. 내 속의 이야기가 소화될 때까지 곱씹고 해독해 언어로 재구성하는, 그 지난한 과정 자체가 삶의 목적과 일맥상통한다고 느낀다. 내 예술의 관객이 나 하나가 될지언정 나는 창작을 멈출 것 같지 않다.
2025.5.17. 대학 입학 첫 학기에 수강한 인공지능 교양 수업 에세이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