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학을 가다
중학교 졸업식을 한 달여 가량 앞둔 1997년 1월 23일 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해외여행은커녕 비행기조차 처음으로 타는 것이었지만 나의 첫 비행기는 나를 너무도 먼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경유 포함해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물리적으로 먼 거리이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먼 거리였습니다. 15 하고도 반년 동안 살아온 환경과는 너무도 다른 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그 많던 친구도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때 내 옆에는 유일하게 엄마가 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정말 막연한 상태로 공항에서 내리고 2주일이 정신없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앞으로 머물 하숙집에 들어갔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세계를 맞이하는 모든 순간에 엄마가 옆에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낯선 순간들을 버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 딱 2주가 되는 날 엄마는 떠났습니다. 난 아침에 학교를 갔고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없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얼마 전 캐나다인 하숙집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만들었던 김밥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남은 식재료를 이용해 아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맛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날 학교를 마치고 엄마가 없는 빈 집을 맞이했던 내 감정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마음 전체가 어떻게 된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습니다. 그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알 수 없는 그 이상한 상실감 같은 허전한 기분은 내가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계속 숨어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지낸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내가 캐나다에 처음 도착한 그 시절 나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외로움과 싸우면서 힘들어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한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오로지 내 관심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날 그 식탁에서 맞이한 김밥을 바라본 지 25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내 자식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캐나다라는 낯선 곳에 어린 자식을 홀로 남겨놓고 오는 부모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엄마 또한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었을 것입니다. 아직 어린 자식을 홀로 놓고 오는 마음이 감히 상상이 안됩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지만 참아야 했던 그 마음을 나는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나의 외로움과 두려움만이 이 유학을 위해 감내해야 했던 전부라 생각했지만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참아야 했던 사람이 또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가 떠나고 나의 캐나다 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인 토론토에서 40분 정도 차로 떨어진 옥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천주교 신자였고 그 덕에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난 일반 공립학교 대신 규율이 더 엄하고 공부하기 더 적합하다는 가톨릭 스쿨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 캐나다 학교의 특성상 한국에서의 학년을 정확히 맞출 수는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9학년 2학기로 입학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6개월을 유급하여 다시 중학교를 다니는 것이지만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내게 일반 캐나다인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는 것은 큰 도전이었습니다. 캐나다의 교육 시스템 상 필수인 영어와 수학을 제외하고는 내가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야 했는데 난 과학을 내 선택 중에 포함시켰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과목이기에 그 선택은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과학 선생님은 내 법적 보호자에게 모욕적으로 권유했습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내가 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뿐더러 학점을 이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체육 같이 영어가 덜 필요한 과목으로 바꾸라고. 그럼에도 난 내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9학년 과학 과목의 내용 자체는 중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아주 간단한 것들이었으나 용어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모든 단어를 사전으로 찾아봐야 했으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책에 있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Photosynthesis'라는 광합성이라는 뜻을 가진 복잡한 단어를 보면서 느꼈던 충격은 너무도 생생하여 지금도 그 단어는 머리에서 절대 떠나가지를 않습니다. 이미 배운 내용이라 단어를 보면서 눈치로 상황을 파악하고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공부한 결과 가장 높은 등급인 A학점 근처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과학 선생님에게 직접 인정을 받고 나서는 나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 봐도 그 시절에는 정말 열정과 오기로 열심히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기의 뒷배경에는 충분하지 않은 형편에 나를 유학 보내주고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을 견뎌내고 있던 나의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필사적으로 버텼고 죽을힘으로 참았습니다.
학년 별로 배정받은 교실에서 조회 같은 것을 하고 본인이 선택한 과목에 따라 해당 교실로 이동을 하는 방식으로 학교 생활이 진행되었습니다. 하루의 시작인 조회를 할 때면 나는 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 옆에 꼭 앉아야 했었습니다. 그 친구에게는 항상 곁에 붙어서 학교 생활을 도와주는 보조 교사 같은 분이 계셨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내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학교에서 아침 시간에만 나도 같이 잠시 봐주도록 해준 작은 배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혹시 특이 사항 같은 것이 있다거나 다음 수업은 어디로 가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손짓 발짓을 통해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려가 어린 나에게는 상처처럼 다가왔습니다. 장애가 있는 그 친구처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애가 있는 그 친구를 비하하거나 낮게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사춘기의 청소년에게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능력을 모두 빼앗겨 버린 듯한 느낌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싶은 것일 뿐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에 친구가 거의 없었고 그나마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숙집 할머니가 싸준 샌드위치는 화장실 칸 안에서 문을 잠그고 먹거나 배고픔을 참고 집에 와서 먹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9학년을 마쳤습니다. 문제도 많이 일으키고 위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캐나다에서 첫 발은 성공적으로 내디딘 것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내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던 엄마의 믿음이 내가 견디어 내고 성취를 하는 발판이었다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엄마는 정말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유학이 확정되고 미친 듯이 놀면서 방황도 하던 중학교 3학년 2학기 시절에 나는 담배를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담배를 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집 안에서 편하게 담배를 피우는 것이 당연했고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피해 나는 엄마, 누나와 함께 안방으로 대피하고는 했었습니다. 담배 냄새를 너무나도 싫어하던 나였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그 나쁜 걸 배웠습니다. 당연히 엄마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캐나다에 간 지 한 달 정도 지날 무렵에 나는 2일 정학을 당했습니다. 집 근처 쇼핑몰에서 담배 피울 때 한두 번 얼굴 봤던 친구를 학교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 친구는 나에게 담배를 얻어 가면서 같이 피자고 말했습니다. 한국과는 다르게 학생들이 담배를 펴도 캐나다 선생님들은 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퇴근하면 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같이 흡연을 한다고까지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그 사실을 알았기에 옆문으로 나와서 아무 거리낌 없이 담배를 폈지만 그것이 학교 규칙 위반인지는 몰랐습니다. 학교 건물 주위의 일부 땅까지 학교의 소유물이었고 그 땅을 넘어서는 상관이 없었지만 그 안에서는 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정학 처분을 받는 것이 교칙이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징계를 받았고 엄마에게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그 비밀이 정말 황당하게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날 이후 내게 그 사건과 관련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얘기에 의하면 내 법적 보호자가 학교로부터 연락을 받고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걸 알고 있었냐고 물으며 전반적으로 나를 문제 학생으로 몰아가기에 엄마는 다 알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는다고 내 편을 들어줬다고 했습니다.
동네 한국 친구들과 밤을 새우며 술 먹고 놀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숙집 할머니는 내가 들어오지 않자 경찰에 신고하였고 집으로 방문한 경찰과 면담을 하고 나서 학교에 간 적이 있었을 정도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그 어떤 사고를 쳐도 엄마는 화를 내거나 나를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공부도 좋아했지만 노는 것도 그만큼 좋아했었습니다. 그렇게 노는 와중에도 나의 원칙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고 전적으로 엄마가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난 내 원칙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