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자서전

(4) 아빠

by 초리

"한국에 빨리 들어오면 좋겠어. 아빠가 조금 아프셔."

그 말을 나는 잠시 잊었습니다.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놀았습니다. 엄마의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아주 잠시라도 그냥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같은 아파트라 그 누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오고 있었습니다. 집까지 오는 20여 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나의 예상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도착해서 만난 아빠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살이 너무 빠지고 한순간에 갑자기 늙어서 20년 정도의 세월을 갑자기 홀로 뛰어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빠는 중증 암에 걸렸습니다. 예후가 좋지 않아 1년 이상의 삶을 장담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빠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캐나다에 가고 난 후 가끔 한국에 놀러 와도 아빠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매일 같이 친구들과 노느라 새벽 늦게 집에 들어왔고 아빠가 출근하면 일어났습니다. 그런 생활 패턴이 계속되자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지내왔지만 아빠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엄마한테 대신 화내기는 했지만요.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빠는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아빠의 유일한 낙은 술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나 또한 호기심에 유학 가기 전부터 술을 먹기 시작해서 술 없이 친구들과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술을 가까이했지만 아빠와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번 아빠와 제대로 술을 먹은 날이 있습니다. 표현을 잘 못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아빠는 그날만큼은 얼굴에 감정을 숨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아빠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그날 생각이 가장 먼저 났습니다. 그 좋아하는 술을 왜 딱 한 번밖에 같이 못했을까...... 그리고 그 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그 생각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입원해서 치료를 받다가 집으로 왔고 내가 공부를 쉬지 않고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나를 설득하였습니다. 나는 그런 아빠 옆을 한 달여 가량 지키다가 새로운 학기를 위해 캐나다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1년을 보냈습니다. 대학교 4년의 모든 과정에서 딱 한 과목이 모자라 계절 학기를 듣고 있던 어느 날 엄마한테 전화가 왔고 난 운명적으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2005년 5월 14일,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지 정확히 27년이 되는 날 새벽에 한국에 도착한 난 바로 아빠가 있는 중환자실로 갔습니다. 의사의 배려로 특별 면회를 했고 그게 살아있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감각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각이 청력이기에 의식이 없을 때라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나는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아빠가 나를 기다려 줬다는 것을. 아빠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서 비행기를 급하게 구하려 했으나 며칠 정도가 걸렸습니다. 엄마는 아빠 곁에서 아들이 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계속 말했고 내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자 힘들게 버티던 삶의 끈을 놓으셨습니다. 의사는 며칠 동안 버틴 것조차 기적이라고 했고 난 아빠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빠가 떠나는 그 순간 엄마는 하염없이 외쳤습니다. 사랑한다고.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사랑 고백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고백이었습니다. 아빠가 아프다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아빠가 가는 그날까지 엄마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처음에는 나도 누나도 없이 혼자서 그 엄청난 사실을 버텨냈고 내가 캐나다에 돌아가야 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떠나는 그 순간 엄마는 오열했습니다. 슬픔에 무너졌습니다. 그런 엄마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에 난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