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자서전

(5) 살아가다

by 초리

어느 순간 시작된 알 수 없는 외로움은 점점 더 나를 괴롭혀 갔습니다. 아빠가 떠난 세상은 한층 더 무서워졌습니다.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되었고 단 한 과목만 남겨두고 난 졸업 대신 군대를 선택했습니다. 26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입대를 하여 5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2년을 보냈습니다. 다시 나온 사회는 여전히 무서웠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내가 이런 힘든 일을 맞닥뜨리면 항상 엄마가 해결해 주었지만 더 이상 엄마는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어른이고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힘들었지만 하나하나 풀어 갔습니다. 마지막 한 과목을 하기 위해 다시 캐나다로 떠났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캐나다의 주요 대학에 직접 연락을 하고 석사에 대해 문의를 하였습니다. 학점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력을 하니 길이 열렸습니다. 토론토에서 서쪽으로 2시간 정도의 거리에 런던이라는 영국의 수도와 이름이 같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위치한 웨스턴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취직하기 시작하던 20대 후반에 캐나다에서 석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아빠가 떠나고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졌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엄마는 무리를 해서 아들의 선택에 드는 비용을 대주셨습니다. 이처럼 살면서 막히는 순간에 엄마는 항상 나의 구세주가 되어주었습니다. 엄마 덕에 다시 한번 캐나다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였습니다.

런던에서의 삶은 외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던 런던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그런 삶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잠을 자는 완벽한 혼자만의 삶이었지만 그런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후에 항상 아이와 놀아줘야 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런던에서 혼자 지내던 그 생활이 정말 많이 생각났습니다. 한동안의 방황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간 캐나다였고 새롭게 시작한 학업이기에 다시 기운을 내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전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날 만큼 그 순간에 충실하게 노력했습니다. 노력한 만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가지고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지고 교수님으로부터 박사 학위 권유를 받았습니다. 진정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캐나다에서 보장된 연구의 길을 버리고 난 또 엉뚱한 선택을 했습니다. 인생의 처음 절반은 한국에서 동양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았고 그다음 절반은 캐나다에서 자유분방한 신대륙의 기질을 느끼며 살았다면 이제는 캐나다의 뿌리가 되는 유럽 문화를 겪어 볼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게 지원해 준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보장된 길을 버리고 황당하고 대책 없는 선택을 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어리석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나란 인간입니다. 또 그런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우리 엄마입니다.

기계공학이 많이 발달되어 있는 독일이나 네덜란드 소재의 공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희망하였지만 제대로 된 계획도 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또 일정 기간 방황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난 한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머물던 어느 날 우연히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텔레비전 광고도 많이 나오고 이름도 많이 들어본 큰 규모의 타이어회사에서 해외 학위 소지자를 대상으로 연구원 모집을 한다고 했습니다. 독일의 학교를 알아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일단 지원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헤드헌터에게 답장을 하였고 그렇게 한국에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우연히 크게 별생각 없이 한 그 선택이 나의 다음 10년, 혹은 그 이상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런던에 가던 그 느낌으로 아무 연고가 없는 대전이라는 도시로 캐리어 하나를 들고 떠났습니다. 구조 해석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원으로 열정적인 시기를 보내기도 하였고, 매일 반복된 일상과 연구라는 본질에서 멀어지고 억지 성과를 포장하기 바빴던 조직에게 실망하는 시기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기도 하였고 대전이란 도시가 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이 결혼도 하였고 결혼한 지 4년이 훌쩍 넘어서 아이가 생겼습니다. 결혼도 아이도 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난 그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교육 방식이 싫다고 다른 나라로 떠났고 보장된 길을 버리고 엉뚱한 선택을 했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 그저 좋은 대학 나와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최고라던 기성세대의 말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항상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좋은 거라 말하였지만 매일 똑같은 나의 일상이 그리고 10년이 지나도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더 두려워졌습니다.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직급에서 독일의 유수한 대학과 같이 산학과제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능력이 있는 집단이었지만 현업에서 필요한 기술과 이론적으로만 유효한 기술 사이에 간극을 좁히지는 못했습니다. 회사에 들어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 독일에서의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산학과제의 경험으로 인해 공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대학 시절 사회적인 비전이 훨씬 낫다는 이유로 자연과학이 아닌 공학을 선택한 결정을 크게 후회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부터 고민이 많은 시기였기에 대학 시절 외로움과 함께 찾아온 내 속의 소크라테스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도 책을 많이 읽는 스타일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정말 많은 책을 봤습니다. 이전에는 역사 같은 한 분야에 치우쳐 있었지만 이때는 평상시 잘 안 보던 분야까지 닥치는 대로 다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모든 이유는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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