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 밖에서 대기하는 중에 틈만 나면 간호사들에게 환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내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내 손으로 느끼고 싶었다. 남편을 못 본 지 몇 달이 지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종교도 없는 나에게 하나님은 여러 가지 확답을 주셨다. 평소보다 더 친절한 척 간호사와 전화 통화를 했고, 더 간절하게 질문했다. 간호사가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고 환자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중환자실 앞에서 하릴없는 기다림이지만 이런 소소한 일이 하루하루 감동을 줬다.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도 쉽지는 않았다. 코로나 검사를 하라고 해서 병원 1층 검사실에 갔더니 검사비용도 엄청 비쌌다. 급한 마음에 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도 까마득히 먼 일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음성이 나왔다는 결과를 받았다. 일찌감치 중환자실로 쫓아갔다. 검사결과를 들이밀고 기다리는 시간도 길게 느껴졌다. 중환자실에서 남편을 만나고 나왔다. 긴 기다림에 비해 짧은 15분간의 면회,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딱 1번뿐인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15분 정도 얘기했는데 막상 만나니 할 말이 별로 없다. 다행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봐주니 감사했다.
내가 누구야?
조인수지 누구야.
나 알아보겠어? 내가 누구야?
내 마누라지.
어, 정말? 자기 딸은?
응~ 딸이 있었나? 아, 정형자!
어, 정형자는 누나잖아. 큰 누나!
아, 그런가. 어~엉 보영이, 아 찬영이도 있다.
맞아, 맞아, 그럼 사위는?
사위가 있었어?
응. 보영이가 결혼했잖아.
아, 모르겠어. 남편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남편은 나를 알아보았고, 겨우 자신의 딸과 아들을 기억해 냈다. 다른 사람을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 외 다른 말들은 횡설수설이었다. 남편은 새로운 인생 2막을 시작했다. 2살 정도의 행동으로 보이는 겨우 말하고, 겨우 기억해 내는 정도로 내게 돌아왔다. "발 움직여 봐 바. 눈 돌려 봐 바. 내 손 꼭 잡아봐." 손에 힘도 있고, 손, 발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도 할 줄 알고... 이젠 됐다고 안심했다. 주사 바늘을 찔러댄 상처로 팔과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올라 있었고, 눈의 시선은 약간 먼데를 응시하듯 보였지만 살아 돌아왔으니 됐다. 뇌출혈이 뭔지, 지주막하 출혈이 뭔지, 하나도 몰랐던 내가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공부했던 반신불수 증세가 남편에게 없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제 다시 키우면 되겠다. 두 아이도 키웠으니 남편도 잘 키울 수 있어. 다짐했다.
병원 앞에서 식사하고 나오는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식사시간 후 중환자실 회진할 거니 후에 설명해 주신다고 했다. 기다림에 비해 설명은 짧다. 같은 한국말인데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은 말을 듣고 혼자 되뇌어 본다. CT를 한번 더 찍어보고 더 이상 출혈이 없으면 입원실로 올라갈 수도 있다고 했다. 희망적이다. 이대로 나아지고, 이대로 기억이 살살 돌아오게 되기를 바랐다. 이대로 조금만 아프고 앞으로 30년 함께 잘 살아 보자. 내가 먼저 죽고 내 뒤를 수습해 주기로 해 놓고 이러기 없기. 남편과의 약속이 기억났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남편도 나와의 약속이 기억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