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제라늄 Feb 15. 2020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러다가 넘어질라

새벽 4시에 도착한 피에르의 메일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Joan, just do what you can do!



우리 회사의 한국 지사에 처음 입사했을 무렵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치된 설비를 홍보하던 시기였는데, 국내에 대체인력이 없던 상황이라 업무량이 말도 못 하게 많았다. 아침 8시 반부터 일과를 시작해서 새벽 2시 퇴근이 일상이었고, 다시 4시까지 프랑스 본사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잠은 하루에 3시간이면 감사한 날들이었다.


워낙 진행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잠자는 시간을 쪼갰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커피로 도핑을 했다. 정말이지 초능력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긴박한 상황을 잘 아는 프랑스 본사 총괄 책임자가 건네 온 말이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라니!!!  




간혹 신입사원들에게서 보이는 경향이긴 한데, 새로 입사한 회사에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무리수를 던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본인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존 직원들과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새 직장에서 확고히 입지를 다지기 위한 생존 본능일 수도 있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선을 넘어설 때 생긴다. 그러니까 본인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또 하겠다고 오버할 때 말이다. 나도 그랬나 보다. 딱히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회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었지만, 딴에는 혼자서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줄 알았었나 보다. 6개월이 넘도록 매일 16시간씩 방진복을 입었고 하루에 고작 3시간씩 자면서도 자꾸 ‘더 해보겠다’며 나를 극한으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이런 나의 하루 일과를 뻔히 아는 피에르는 그래서 더 걱정했었던 것 같다. 분명 시간이 나지 않을 텐데 내일 당장 추가 테스트를 해보겠다고 대답하고, 매일 새벽 4시까지 잠들지 않고 메일을 보내고 앉아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브레이크 없이 전력질주를 하던 나를, 마침내 그 한 마디가 멈춰 세웠다. 그분이 한국에 출장을 왔을 때, 업무 시간이 촉박하다고 총총 달려가던 나에게 ‘그러다가 넘어져. 뛰지 말고 걸어가.’라고 말하던 바로 그 조용한 목소리였다. 


누구에게나 멈춤은 필요하다 (Photo by Pixabay)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라’는 말은 그 자체로 위안이고 휴식이었다. 잘해야 한다는, 또 잘 해내고 싶다는 강박을 해제시키는 말이었다. 전진하는 만큼 또 멀어져 버리는 아득한 목표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초라해지는 존재를 다독이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없는 것까지 책임지려 하지 말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먼저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말이었다.


이제는 가끔 나 자신에게 그 말을 해 주곤 한다. 하루가 벅차다 느껴질 때, 욕심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 마음의 균형을 잡아주는 나만의 나침반이다. 


Merci beaucoup encore, Pierre!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hoto by Pixabay)


그대를 향한 다정한 마음을 씁니다. 

- 파리제라늄_최서윤 -

매거진의 이전글 배고프니까 우울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