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패션 디자인 회사 인턴의 이야기
최근에 같은 과 동기의 소개를 받아서 한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단기 인턴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어렵게 된 인턴이기도 하고, 첫 사회 진출이기도 하니까 인턴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일을 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디자이너 선생님들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기대, 어엿한 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등등…. 실제로 어느 정도 기대가 충족되기는 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분야에서 처음 일하는 것이다 보니까 모든 일에서 배울만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기대와 너무 다른 부분이 있어서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특히 저를 가장 실망시켰던 것은 월급 액수였습니다.
50만 원이면 많이 받는 거예요
보통 디자이너 사무실에서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인턴을 고용한다고 합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동기들 중에도 일을 시작하면서 근로계약서 쓴 친구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근무 조건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 회사에서 일을 했던 저의 동기가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친구가 이 회사는 그래도 최저 시급은 맞춰서 준다고 해서 일할 결심을 굳혔던 건데 실제로 일해 보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르바이트로 이 회사에서 일을 했던 거라 최저 시급을 맞춰서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인턴 급여로 받은 금액은 50만 원 이었습니다.
패션 디자인 업계도 평균적으로 야근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 업계 인턴들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합니다. 월급을 적게 주면 이런 수당이라도 잘 챙겨줘야 하는데, 패션 디자인 업계에서 야근 수당 받고 일하는 인턴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일한지 얼마 안 됐지만 벌써 몇 번의 야근을 경험해봤는데 야근 수당 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디자이너 선생님이 저녁 사주는 게 야근 수당 대신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50만 원은 온갖 수당을 다 합친 금액인 겁니다.
50만 원이면 현실적으로는 생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금액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고향이 지방이여서 서울에서 방을 빌려야 하는데 월세가 평균 50만 원 정도합니다. 월급 받고 월세 내면 남는 게 없는 거죠. 결국 교통비나 식비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부모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친구들은 적은 인턴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서 쉬는 날 아르바이트를 1~3개 정도 한다고 합니다.
50만 원은 상식적으로 월급으로서는 매우 적은 금액이지만 이 업계에서는 함부로 적다고 불평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50만 원도 못 받거나 무급으로 일하는 인턴들이 엄청 많기 때문이죠. 다른 예술 업계에서 일하는 인턴들과 제 월급을 비교 해봐도 50만 원이 적은 금액이 아니더라고요. 패션 업계는 상업화가 많이 된 곳이다 보니까 일할 곳도 비교적 많고 월급도 비교적 많이 주는 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화처럼 순수 예술 업계는 상업화가 많이 안 되어 있다 보니까 일할 곳도 별로 없고,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대부분이 심부름 값 수준의 월급을 주는 곳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실정이다 보니 패션 업계 인턴들이 함부로 월급이 적다고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열정페이는 남 일인 줄
인턴십을 하기 전에는 왜 사람들이 열정페이를 주는 회사에서 일하는지 이해를 전혀 못했습니다. 저였다면 열정페이 준다는 회사는 아예 들어갈 생각조차 안 해 봤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인턴십 자리를 직접 구하려고 하니까 최저 시급 맞춰서 월급을 주는 곳은 대부분 이미 패션 업계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고 싶어 했습니다. 주로 대기업 패션 업체들이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서 월급을 주는데, 그런 대기업열 곳 정도에 지원서를 냈지만 전부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지원서를 낼 수 있는 곳은 최저 시급을 맞춰주지 않는 곳들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최종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대기업 패션업계인데 이런 곳에 들어가려면 우선 인턴 경험이 많아야 하니까 월급이 50만 원인 줄 알면서도 그냥 일하는 겁니다. 아마 지금 열정페이 받으면서 일하는 친구들도 저와 다 같은 심정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고생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품으면서 말이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이지 않나요? 전체 업계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0% 정도라고 하면, 나머지 90%는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곳과 같은 소규모 업체 일 것입니다. 결국 업계 구조상 앞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정페이 수준의 대우를 받으면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이걸 생각하면 약간 두려워집니다. 지금은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버티고 서 있는데, 평생 열정페이 받으며 일하는 것이 제 운명이 될까봐서요.
말라야 인턴도 할 수 있어요
디자인 업계의 경우에는 피팅 모델이 반드시 필요한데 아르바이트로 피팅 모델을 하면 시간당 만 원 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 돈도 아까운지 요즘에는 인턴을 뽑을 때 사무보조와 피팅까지 겸할 수 있는 인턴을 찾습니다. 그런데 인턴이 피팅 모델 역할을 대신해도 한 시간 당 만 원으로 계산해서 월급을 주지 않습니다. 패션 업계에서 일하는 인턴들의 평균 월급이 50만 원 정도인 것 같은데 이 금액에 피팅비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50만 원에 사무보조 피팅 모델일 까지 다 시킬 수 있으니 회사 차원에서는 엄청난 이득일 겁니다. 반면에 인턴들은 업무 보조에다가 피팅 모델까지 겸해야 하니까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피팅 모델은 잠깐 일하다 갈 사람이지만 인턴은 식구로 여긴다는데, 왜 식구 같은 사람에게 잠깐 일하다 갈 사람보다 적은 금액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옷 입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피팅은 그냥 옷 입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 디자이너 브랜드는 S, M 사이즈 위주로 옷을 만드는데 S 사이즈가 44, M 사이즈가 55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피팅 모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델처럼 정말 마른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서 패션 디자인 업계에서는 인턴 공고 낼 때 아예 원하는 신체 사이즈를 명시해 놓습니다. 키는 평균적으로 163cm 이상, 허리는 24-25, 어깨는 33-35 반, 이런 식으로 굉장히 구체적으로 신체 자격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면접 때 피팅 면접이라고 해서 그 회사의 옷을 입은 지원자의 모습을 평가하는 단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패션 디자인 회사들이 공고에 구체적으로 신체 조건을 적고, 피팅 면접을 필수적으로 하다보니까 저도 인턴십을 준비하면서 다이어트를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앞으로 가고 싶은 회사는 정말 마른 인턴을 찾는 곳이어서 계속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은 어떻게 해서든지 뺄 수는 있지만 키는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업계에서 평균적으로 요구하는 신장은 163cm 이상인데, 이 키가 안 되는 친구들은 피팅이 필요 없는 소재나 MD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 : 기업에서 실제로 인턴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실무자 분, HR 담당자 분 등 기업의 관점에서, 혹은 본인의 관점에서 '인턴제도'에 대해 말씀을 나눠주실 분을 찾습니다. 갖고 계신 생각을 공유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턴제도에 대한 의견을 공유해주실 분은 subinne@naver.com 으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