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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숲 Jan 31. 2018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인턴십

R&D 스타트업 인턴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는 R&D 스타트업에서 약 6개월 간 인턴십을 했던 인턴 F와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힘든 것도 나중에는 다 추억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말이 맞지 않았습니다. 6개월 동안 첫 인턴십을 했던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기는 저에게 추억이 아니라 아픈 기억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 R&D 스타트업에서 정규직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턴십을 했던 곳도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정규직 전환이 되어서 지금은 회사를 잘 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인턴에서 정규직 직원으로 전환되기까지의 그 과정이 몹시도 힘들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다녀야 할 회사이기 때문에 그 회사에서 제가 인턴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을 그 어디에서도 쉽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힘들었던 것에 대해 힘들다고 말을 하면 감정이 조금 해소가 된다던데, 저의 경우에는 힘들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 시기의 기억이 여전히 아프게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시기에 대한 제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뀌는 인턴의 삶    


  계약을 할 때에는 6개월 간 인턴으로 일하면 별다른 평가 없이 정규직 전환이 100%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6개월만 지나면 당연히 정규 직원이 될 줄 알고 인턴십을 시작하면서 학교도 졸업했고, 다른 회사 채용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회사의 말과 달리 ‘소정의 평가 후 정규직 전환’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계약서에 대해 묻는 것이 실례가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인턴 계약 만료일이 삼 주 정도 남았을 무렵 회사가 갑자기 정규직 전환 여부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인턴들을 회식이라는 명분으로 불러 모아 놓고 하는 말이, “지금까지 수고가 많았다. 이 회사에 아쉬움 남기지 말아라. 너희들은 다른 회사에 가서도 잘 할 것이다.” 였습니다. 사실상 정규직 전환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겁니다. 회식 다음날에는 상사 분들이 인턴들을 한 명씩 부르더니 어제 한 말이 사실상 계약 해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고 확인시켜주기까지 했습니다. 


  확답을 들은 후 저는 정말 ‘멘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억울하게 잘려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장 몇 주만 지나면 이 회사에서 나가야 하고, 나가자마자 하반기 공채를 준비해야 하는데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엄청 불안했습니다. 이 회사에 어떻게 해서든지 남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계약 해지 통보를 들은 후에는 더욱 제 실력을 증명해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회사 측에서도 너희를 언제든 자를 수 있다는 식의 협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인턴들에게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계약 만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까지 저는 이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니어 한 분이 인턴이 정말 열심히 일했으니 정규직 전환을 꼭 시켜주어야 한다고 회사와 싸워 주신 덕택에 극적으로 정규직 전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럴 거면 지원 직무는 왜 적었나    


  제가 이 회사에 지원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직무였습니다. 전공 분야도 미디어 분야였고, 쌓아온 스펙도 미디어 분야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디어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마침 이 회사에서 미디어 팀 직원을 뽑는다고 하기에 냉큼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를 쓰러 갔더니 제 업무가 ‘미디어팀 업무 보조 외 그 외의 일’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계약서를 쓰면서도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버릇없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계약서에 싸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끝까지 물어봤어야 하는데 말이죠.


  첫 출근을 하고보니 제가 일하기로 했던 미디어팀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제가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즈음에 회사가 설립되었던 터라 당시에는 없는 부서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미디어팀이 그 중 하나였고요. 미디어팀 인턴으로 뽑혔지만 미디어팀 자체가 없는데 제가 어떻게 미디어 관련 업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6개월 동안 인턴으로서 한 일은 외교, 정치, 과학 분야의 다양한 리서치를 하는 것으로, 미디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미디어 분야로 전문적인 커리어를 개발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커리어 패스를 짰고, 이 회사의 미디어팀 인턴에 지원한 것도 커리어 패스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인턴으로 근무한

6개월 동안 커리어 개발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요령피우며 일하자    


  인턴으로 일하면서 제가 주로 했던 일이 리서치 보조였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리서치라는 것이 사적인 일인지 공적인 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저의 회사에 소속된 박사님들은 다른 곳과 여러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연구에 필요한 리서치까지 저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정말 개인적인 요구까지 하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제 동료의 경우 상사분이 자기 아들의 대학 입학 자기소개서를 써 달라는 부탁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저한테 일이 주어지면 그 일이 사적인 일이던 공적인 일이던 무작정 해버렸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 ‘오케이’를 해버리는 인턴은 상사 분들로부터 더 많은 일들을 부탁받기 마련입니다. 그게 정말 인턴이 해야 할 일이 아니어도 말이죠. 상사 분이 일을 시키시면 먼저 ‘이 일은 왜 필요한 일인가요?’ 라고 묻고,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면 ‘제가 다른 일을 급히 수행하는 중이라 못 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등의 요령을 피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제 경험상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정규직 전환 시켜주지 않으니 부탁받은 일을 하기 전에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꼭 물어보셨으면 합니다.     




여대 나와서, 여자라서 죄송합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조직은 현저히 남성이 많은 조직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성에 대한 배려도, 이해도 별로 없는 편이었습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시니어 분이 갑자기 ‘나는 솔직히 여대 나온 사람을 혐오한다’ 라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성신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봤는데 성신여대 애들이 공부도 못하고 쓰레기였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때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여대를 나온 사람은 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를 저격해서 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분들이 문제의 상사 분이 술을 마셔서 그러는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이 상황을 무조건 이해하라고만 하셨습니다. 저에게 사과를 하라고 한다거나, 그 분의 발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그런 말을 들은 저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한 이 조직에는 차를 타거나 손님을 모시는 일은 여자의 일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한 번은 다른 남자 인턴이 손님이 오셔서 차를 내갔는데, ‘차는 여자가 타야 제 맛이지’ 하면서 은근히 남자 인턴에게 눈치를 주기도 하더랍니다.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손님이 오시거나 차를 타야 할 상황이 오면 저에게 시선이 먼저 닿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 원래는 차 잘 안타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 드릴게요’ 라고 말하면서 차를 탑니다. 굳이 사족을 덧붙이는 이유는 제가 아무 내색 없이 커피를 타면 회사 내에서 차타는 일은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공식이 더 견고해질 것 같아서입니다. 



최저 시급은 최저 시급일 뿐 최고 시급이 아니다    


  스타트업이라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던지 하는 문제가 없었냐고 물어보셨는데 저는 반대의 경우였습니다. ‘우리 회사는 스타트업임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많이 주니까 언제든지 너희를 잘라도 책임이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받은 월급은 세전 150만 원 정도였습니다. 1년 전 쯤에 인턴을 했으니까 그 때 당시 최저시급으로 계산한 월급보다는 약간 웃도는 금액이었죠. 하지만 평균적으로 주 2-3회 정도 했던 야근이나 1시간 이른 출근시간 등을 반영하면 결코 많은 월급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마치 어마어마한 금액을 주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우리는 다른 스타트업과는 달리 너희들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 자를 수 있다는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출근시간은 9시였지만 회사에서는 셔틀버스 시간에 출근시간을 맞추라며 7시 45분까지 회사 인근 지하철역에 도착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셔틀버스를 타면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은 8시 정도였고, 저는 어쩔 수 없이 8시부터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퇴근시간은 6시였지만 6시에 딱 맞추어서 퇴근해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인턴들에게 6시에 자유롭게 퇴근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퇴근 시간 전까지 끝낼 수 없을 양의 일을 주었기 때문에 6시 정시 퇴근은 상상 속의 이야기였습니다. 또한 스타트업은 직원들 전부가 모여 회의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2박 3일 일정의 워크숍에 인턴들도 참석하라고 요구해서 주말 시간도 회사에 반납한 적이 많았습니다.     



인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일 년 전만해도 인턴이었던 저는 어느덧 인턴들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직급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인턴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본인의 능력보다는 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규직 전환이 되는 데에는 80% 정도는 운이, 20% 정도는 개인 역량이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속한 팀이 하는 일이 단기적으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일이라면 그 팀의 인턴은 정규직으로 전환될 확률이 높을 것이지만, 지금 하는 일이 잠깐 필요한 일이라면 그 팀에 속한 인턴은 전환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턴들은 정규직 전환 여부가 자신의 역량에 달린 줄 알고 너무나 일을 열심히 하고, 만약에 전환이 되지 않으면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기 일쑤인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직 전환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량보다 타이밍과 운이 더 중요할 때가 더 많으니까요. 열심히 인턴 생활 했던 곳에서 정규직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운 때가 안 맞았다고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세요. 운이 따르는 기회는 결국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말 : 기업에서 실제로 인턴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실무자 분, HR 담당자 분 등 기업의 관점에서, 혹은 본인의 관점에서 '인턴제도'에 대해 말씀을 나눠주실 분을 찾습니다. 갖고 계신 생각을 공유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턴제도에 대한 의견을 공유해주실 분은 subinne@naver.com 으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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