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턴백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숲 Mar 31. 2018

지나친 절실함은 독이다

언론사 인턴의 이야기

저는 졸업을 하고 바로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있었던 언론사에 들어갈 때 즈음에는 ‘하루 빨리 취업 해야겠다’는 불안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그 회사의 입사 시험을 보기 전까지는 인턴 생활을 전전하고 있었고, 해가 갈수록 ‘언제까지 내가 인턴 생활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졌습니다. 동시에 안정적인 일자리,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절실함이 커졌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언론사의 정규직 직원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고, 운 좋게 최종 면접까지 통과했습니다.        



의심을 내려놓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관행     

 

채용 공고에는 정규직 직원을 뽑는다고만 쓰여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수습 기간 없이 바로 정직원이 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를 작성할 때가 되자 회사는 ‘원래 우리 회사는 1년 정도 계약직을 한 다음에 정규직 직원으로 전환이 된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비롯하여 함께 입사한 두 명의 친구들이 그런 계약서에는 싸인 못하겠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회사 측에서는 1년 동안 계약직 신분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관행일 뿐이며, 1년 계약 종료 이후에는 어떠한 통과 의례도 거치지 않고 바로 정규직 전환이 된다고 장담했습니다. 회사에서 하도 장담하듯 이야기하기에 별 문제가 없을 줄 알고 계약직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렸습니다. 


계약서 작성 후 3개월 동안은 수습기자 신분으로, 이후 9개월 동안은 계약직 기자로 일을 했습니다. 1년 계약 기간은 형식적인 것뿐이라는 회사 관계자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습니다. 계약직 신분이었던 저에게도 정규직 직원과 동일한 급여과 근무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입사하자마자 회사에서는 저에게 기자라고 쓰여 있는 명함을 나눠주었고, 정규직 직원과 같은 출입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 이름을 걸고 단독 기사도 쓰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기자협회에 제 이름을 등록시켜 주었고 회사 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했던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해주고, 더 나아가 정규직 전환 약속까지 확답해준 회사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회사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계약 기간이 한 달 남기 전까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계약 기간이 한 달 남았을 때 즈음 충격적인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가니 슬슬 퇴사 준비를 하라는 내용의 메일이었습니다. 메일을 보고 저와 함께 입사했던 친구들과 함께 담당자 분을 찾아가 ‘우리는 구두로 정규직 전환이 확실히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갑자기 퇴사를 하라고 하냐고’ 따졌습니다. 자기네들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되풀이 했습니다. 결국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 달 뒤에 나가야만 하는 회사라는 걸 알게 되니까 순식간에 일할 의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퇴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 계약직은 관행이라는 회사의 말과는 달리 회사 내에는 아예 그런 관행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동일한 경로로 정규직 기자가 되었다는 동료나 선배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관행이라는 회사의 말이 거짓이었다고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채용 제안을 받았을 때에 회사에 중요 인력의 공백이 갑작스럽게 생기면서, 그 공백을 단기간 동안 채워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정규직 직원을 채용하면서까지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부담스러우니까 계약직으로 1년 동안 일하는 것이 관례라는 거짓말을 하면서 제가 순순히 계약직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의 대응     


그 때 당시 노동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제가 처한 이 상황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노무사나 회사 노조를 찾아가서 제 상황을 설명하고 이럴 때 어떻게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이 상황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배웠지만 결국 제 선택은 가만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선배의 조언을 듣고 저의 미래를 위해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한 선배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했더니, 당한 것은 억울하겠지만 이 업계는 굉장히 좁고 소문도 빨리 나는 곳이니까 다음 직장을 위해 이곳에서는 조용히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선배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가만히 있으라는 선배의 그 말이 아끼는 후배를 위한 최선의 답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기자 업계에서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지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선배의 말이 정답처럼 느껴졌습니다.  


언론사 구분 없이 기자 200명 여명이 모인 단체 카톡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언론사의 인턴이 무차별적으로 욕을 먹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니, 그 인턴의 담당자였던 기자 분이 ‘이 인턴이 우리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다닌다’는 글을 카톡방에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글과 함께 실제로 그 인턴이 인터넷에 제보한 내용을 캡처한 사진도 첨부해서 말이죠. 모든 사람이 익명으로 활동하는 방이기 때문에 인턴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인턴은 실명 보호 없이 개인 정보를 카톡방에서 다 공개해버렸습니다. 그 글을 읽은 기자 분들이 대부분 ‘그 친구 정신이 없다’고 카톡을 남겼습니다. 아마 그 친구는 다른 언론사에서도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 겁니다.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그 인턴의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 개인 정보, 행적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 ‘왜 나를 부당해고 하냐’고 따지면 카톡방에서 저도 버릇없고 정신없는 여자로 낙인찍혀 어떤 언론사에서도 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됐습니다. 결국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여 조용히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저처럼 언론사에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일을 겪고도 다음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채용되기 직전에 회사에서 잘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인턴 10명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6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결국 단 한 명도 정직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언론사에서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도 언론사 인턴들에게 생기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았습니다. 인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최근 방송사에서는 인턴들의 근로 실태에 대한 다양한 영상물을 제작하여 방송하고 있지만 정작 언론사 내의 인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종편 방송이 많아져서 기자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다고 해도 기자 지망생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언론사는 극소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회사들에서는 한 해에 정규직 기자 한 명 정도 뽑습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까 많은 기자 지망생들이 정기자가 되기 위해서 몇 년 씩 언론 고시를 준비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오랫동안 준비하다보면 기자로 취업하는 것이 점점 절박해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해서든 일단 ‘기자’가 되면 된다는 생각에 어떤 방송사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근로조건도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 취업을 서두르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저도 문제의 회사에 들어갈 때에는 취업에 대한 절박함이 너무 큰 나머지 회사나 근로계약서 대해서 꼼꼼히 체크해보지 않은 채 입사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 같은 부당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저 같은 일을 똑같이 당하지 않으시려면 취업에 대해 약간은 냉정한 태도를 고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들어갈 회사나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신 뒤에 입사를 결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교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