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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숲 Mar 31. 2018

나는 살기위해 용감해졌다

건축사무소 인턴의 이야기

영국의 유명한 건축 대학원도 나오고, 한국에서 건축상 대상도 탄 건축가 부부가 새롭게 차린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한 것이 저의 첫 번째 직장 생활이었습니다. 처음 사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에는 이곳에서 이상적인 인턴십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첫 만남에서 ‘나는 상명하복식 조직 문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 수평적인 관계에서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면서 커리어도 쌓을 수 있도록 힘써줄 것이다.’ 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첫 번째 인턴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부풀었지만 그 환상은 이어지는 다음 말로 깨져버렸습니다. 



불법은 불법일 뿐 오해하지 말자     


사장님은 회사에 대한 좋은 말들을 늘어놓은 후 곧이어 월급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월급이 세전 100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근로계약서를 쓰면서 월급이야기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두로 세전 100만 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전부였죠. 이미 인턴십을 하기 전에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었기 때문에 세전 100만 원이 최저 시급으로 계산한 월급에 못 미치는 금액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습니다. 사장님께 ‘세전 100만원은 불법 아닌가요?’ 라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들은 80만원 받으면서 일한다’, ‘대기업 건축회사들은 인턴들 10-20만원 주면서 일 시킨다’면서 세전 100만원이라는 월급이 절대 작은 금액이 아니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됐든 월급이 최저 시급도 안 된다면 적은 금액 아닌가요?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너무 당당한 사장님의 태도가 참 어이없었습니다.


월급에 대한 협상은 못했지만 근로계약서는 꼭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근로계약서 안 쓰면 일 못한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랬더니 곧 계약서를 써주겠다고 했습니다. 계약하면서 바로 써주면 될 텐데 계약 당일 날에는 계약서를 안 써줬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미루면서 계약서를 끝내 안 써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매일 사장님께 카톡으로 계약서를 써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당연히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기까지 사장님과 주고받은 카톡은 모두 캡처하고, 전화를 하게 될 경우에는 통화 내용을 녹음했죠. 마침내 출근한지 이틀째 되는 날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곳에서 일했던 사람들 모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상태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그 회사에서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써 준 계약서도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급여 액수가 여전히 세전 100만 원이라고 적혀 있어 최저임금법을 위반한 근로계약서였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근로계약서를 써 본 경험이 저 이전에는 없다보니까 합법적인 근로계약서가 되려면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근로계약서를 써 달라고 계속 졸라서 이미 반 쯤 찍힌 상태인데 최저 시급에 맞춰서 월급을 달라고 하기까지 하면 정말 찍힐 것 같아서 법적 효력이 없는 계약서인 줄 알면서도 그 계약서에 싸인했습니다. 하지만 퇴사할 때에는 제가 지금까지 일한 것을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서 달라고 계속 요구해서 최저 시급만큼의 급여는 받아냈습니다.     



내 몸 지키기 위해 퇴사합니다     


건축 사무소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출근한 첫 날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하고 대중교통이 다 끊겨서 자비로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거의 매일 야근한 것 같습니다. 근로계약서를 쓸 때 분명히 주말 근무는 못한다고 했고 사장님도 허락했지만 토요일은 회사에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요일까지는 도저히 일을 못할 것 같아서 ‘저 일요일에는 정말 안 나옵니다’고 말했고, 사장님도 알았다고 했지만 카톡으로 계속 업무 관련 메시지를 보내는 탓에 저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회사에서 늦게 퇴근해도 계속 카톡으로 업무 지시가 옵니다. 사장님의 업무 스타일은 아침 11시 정도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새벽 내내 일하는 겁니다. 본인이 늦은 밤에 일을 주로 하니까 직원들한테도 새벽까지 카톡을 보냅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9시 정시에 출근해야 하니까 그 시간에는 당연히 자야 합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새벽 내내 카톡을 보내면 답장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잠을 거의 못 잔 상태에서 다음 날 출근을 합니다. 한 일주일을 이렇게 보내고 나니까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하면 몸이 정말 망가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늦은 시간까지 하는 업무도 정말 심부름 정도라 제 커리어에도 별 반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회사를 떠나야겠다고 어렵지 않게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일한 지 일주일 되던 날 사장님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저 같이 무책임한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이 업계가 좁은데 제 평판이 나빠질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도리어 협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책임감이 없었다면 새벽 2-3시까지 제가 맡은 일을 끝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을까요? 게다가 저의 갑작스러운 공백 때문에 업무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 대타까지 구해놓았습니다. 이런 데도 제가 정말 책임감이 없는 사람일까요? 책임감 없다는 말에는 코웃음 치고 넘어갔지만, 저의 평판이 나빠져서 앞으로 이 업계에 일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는 사실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선배들과 교수님들께 저의 사장님이 정말 이 업계에서 저 하나쯤은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정도의 분인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다들 아니라고, 몸 생각해서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시면서 제 행동을 지지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일주일 만에 퇴사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너 내가 밟아버릴 거야’ 라는 사장님의 말은 진짜냐고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던 말 같습니다. 저를 겁주려고 한 말이었겠죠. 그리고 인턴이 회사를 나갔다고 마음에 앙심을 품어서 그 사람에 대한 루머를 계속 퍼트리고 다닌다? 이렇게 치졸한 사람이 어떻게 그 업계에서 성공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이 업계에서 제 소문을 이상하게 내고 다닌다고 해도 영향력이 별로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 다른 분들은 겁주려고 하는 말에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미술계는 다른 업계보다 훨씬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부당함에 대해서 공론화하는 것은 응원을 받지 낙인찍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내 말을 들어줄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고, 생각보다 넓어서 한 업계에서 낙인이 찍히더라도 일할 수 있는 곳은 충분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평판이 나빠질까봐 걱정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놓고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이 맞는지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떼인 월급 받는 것 어렵지 않아요      


퇴사하겠다고 말하면서 며칠까지 제가 일주일 동안 일한 만큼의 돈을 입금해달라고도 했습니다. 야근, 주말 근무까지 모두 포함해서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보니까 체불된 임금이 70만 원 정도였습니다. 일한 기간은 일주일밖에 되지 않지만 일한 시간이 거의 100시간이 넘었기 때문에 그 정도 금액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사장님이 책임감 없는 저로 인해서 회사에 큰 손실이 발생했으니 임금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인턴은 원래 수습기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임금을 안 줘도 된다더라, 하는 식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임금을 안 주려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장님이 하는 말들이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25일까지 급여가 입금되지 않으면 고용 노동청에 신고하겠다’ 딱 이 한 마디만 하고 사장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약속된 기일에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로 다시 사장님에게 전화를 거니까 일방적으로 퇴사한 경우에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또 다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강경하게 ‘고용노동청에 신고를 하겠다’, ‘내용 증명을 보내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5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5일 뒤에 돈을 입금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끝내 약속한 기일에서 5일 째 되던 날 제가 청구한 70만 원을 모두 받았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     


처음부터 당당하게 제가 겪는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처음에는 최저 시급에 맞게 월급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몹시 겁났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돈 얘기 하는 것을 무례하다, 버릇없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요? 저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임금 이야기를 했을 때 회사가 절 버릇없는 아이로 생각하지 않을까, 회사가 날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임금 문제는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기분 상할 일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때 회사가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면 그건 그 회사 측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 문제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생존이었습니다. 돈 문제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너무 배려하다가는 제가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우선 살아있어야 감정도 느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대학에 입학한 후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고 노력해왔는데, 학생으로서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최저 시급을 받는 것이었죠. 최저 시급만 받아도 서울에서 1인 가구로 생존하기 참 어려운데,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일할 경우에는 기본적인 생활도 제대로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경제적 독립을 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저 시급 이상은 챙겨 받으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아서 아르바이트생이나 인턴들 월급을 잘 챙겨주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감정싸움이 될까봐 월급이 적어도 적다고 말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최저시급보다 적은 금액을 월급으로 받았습니다. 월급은 최저 시급에 맞춰 주더라도 주휴 수당이나 초과 근무 수당을 안 주는 경우도 많이 있었죠. 최저 시급도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충분치 않은 금액이었기 때문에 월급이나 수당을 제대로 챙겨달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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