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by sso

-일어났니?


B언니였다. 오전 9시.


일어날 생각은 없었지만 햇빛에 떠밀려 억지로 눈을 떴다. 그때 문자가 왔다.


-응, 언니! 방금.

-10분 후에 볼 수 있니?


하하! 언니다운 문자에 웃음이 났다.


-20분 후는 어때요? 나 이 닦고, 세수는 해야지.


언니와 나는, 20여 년 전 교대에서 만났다. 우린 각자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교대에 편입한 같은 과 동기였는데, 알고 보니 3분 거리에 사는 동네 주민이어서 금방 친해졌다. 2시간에 가까운 지긋지긋한 등하굣길을 함께 했고, 방학 때는 언니네 집에서 뒹굴거리며 하루 종일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베프는 아니었다.

언니는 걸음이 무지 빨랐다. 지하철을 놓칠세라 '빨리빨리'를 외치며 앞서 걷는 언니의 뒤통수를 볼 때면 늘 숨이 찼다. '언니, 난 틀렸어. 먼저 가요.'라고 제발 날 포기해 달라고 사정하고 싶은 날이 많았다. 걸음만큼 성격도 급했고, 목소리도 커서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혼나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 시간이 갈수록 언니가 불편해졌다.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웠지만 마음 한편에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져 있는 것만 같은 사이. 내 마음은 그랬다. 졸업 후 각자의 생각과 속도대로 살면서 종종 만나긴 했지만 내가 느끼는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인천에 볼 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마침 언니 집이 그 근처라기에 놀러 가게 되었다. 언니는 내가 온다고 밥상을 한 상 차려놓았고, 본인은 마시지도 않는 커피와 맛집에서 공수해 온 에그타르트 그리고 집에 가져가서 먹으라며 인천 유명 떡볶이 키트까지 사다 놓았다.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울렁했던 내 마음을 눈에 보이게 적어보자면,

'아니 더운 날, 왜 줄을 서서 이걸 다 사다 놓은 거야. 언니한테 나 뭐 돼?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이다. 그래, 나 먹을 거에 감동한 거 맞다. 그런데 그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랜만에 언니랑 둘이 집에서 수다를 떨고 있자니 옛 생각이 난 걸까,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나 사실 교대 다닐 때 너무 힘들었어. 내가 그때 돈이 정말 없었거든. 그래서 빨리 졸업하고 돈 벌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어. 우리 집, 사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져서 그 동네로 이사 간 건데 언닐 거기서 만난 거야."

20년도 더 지난,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가 내 입에서 술술 나왔다.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재수까지 해서 졸업한 대학을 뒤로하고 또 대학에 들어갔으니......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알았기에 더 괴로웠다. 그리고 내 인생의 타이밍이 또 늦춰지는 것에 대한 조바심과 들키고 싶지 않았던 주머니 사정.


"우리 집도 그랬어. 우리 집도 망해서 그 동네로 이사 간 거야."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내 말을 받았다. 우리 그때 다 그랬지 뭐, 우리 아버지 때문에 엄마 속 많이 썩으셨지. 너도 그랬구나.


내 안의 팽팽했던 뭔가가 탁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가난을 지나고 있었구나. 나는 숨기느라 급급했고, 언니는 버티느라 씩씩했을 뿐이었다. 몰랐던 이야기, 누구도 먼저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20년이라는 시간 위에 담담히 꺼내지고, 위로하는 말이 오가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껴안고 화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20분 후, 우리는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여전히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나와 본가에 방문한 언니가 만난 설 전날 아침. 언니의 빡빡한 명절 스케줄 때문에 한 시간밖에 여유가 없었지만 충분했다. 가족, 직장 이야기를 지나 나라는 사람을 열렬히 응원해 주는 언니를 보며 한 살 차이가 이렇게 큰 차이였음을 느낀다. 아니, 시간의 차이만이 아니지. 깊고 넓은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알아본 내 마음의 키가 참 더디게 자라왔다는 걸 깨닫는다. 부끄럽다.


"야, 너 30대로 보여."

누가 들을까 무서운 문장을 던지고 사라진 그녀에게 바로 '반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새해 선물이겠거니, 기꺼이 받아 들고 집으로 간다. 차가운 공기를 상쾌하게 들이마시며 힘차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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