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가명)이는 차분하고 조용한 어린이였다. 공부 시간에 집중하여 참여하고 발표도 곧잘 하는 등 학습 태도가 좋았다. 다만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대화하지 않고 혼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어 교우 관계가 어떤지 꾸준히 관찰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가방에 달린 인형이 눈에 띄었다.
"서연아, 인형 너무 귀엽다. 좋아하는 캐릭터야?"
"네,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인형이에요."
뭐라고, 아이돌? 잠깐만, 나도 지금 덕질 중인데. 갑자기 상황이 아주 흥미롭게 됐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누구 좋아해? 투어스(TWS)요.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투어스? 꺅! 서연아. 너 멋지다!!"
10살 그녀와 나, 둘만의 비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녀의 교우관계를 돕고자 내가 먼저 다가간다는 게 그만, 덕밍아웃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선생님은 엔플라잉(N.flying) 좋아해. 너는 잘 모를 거야."라고 했더니 그녀가 포스트잇에 적어달란다. 잠시 고민하다가 친절하게 엔-플-라-잉, 글자마다 사랑을 담뿍 담아 또박또박 적어주었다.
다음 날, 알림장 검사를 하는데 그녀가 내민 공책에는 어제 내가 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엔플라잉에 대해 조사를 한 듯 다섯 멤버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질문이 있었다.
'선생님의 최애는 누구예요? 제 생각에는 이승협일 것 같아요.'
서연아, 잠깐만.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는 게 어딨어. 선생님, 지금 엄격하게 알림장 검사하는 중인데. 네가 이러면 함박웃음 밖에 안 나온다고. 껄껄껄.
서연이의 눈은 정확했다. 나는 엔플라잉을 사랑하고 그중에서 이승협을 가장 좋아한다. 사십춘기를 겪으며 마음이 어지럽던 때, 평소 잘 보지도 않던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 빠졌고, 거기에 출연한 이승협이 가수라기에 영상을 찾아보다가, 뭐 그렇게 됐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나, 이승협 잘생겨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노래 잘하고, 음악 잘 만들고, 성실하고 겸손한데, 잘생기기까지 해서 좋아하는 거거든.'이라고 어느새 혼자 마음속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늘 보컬을 사랑해 왔다. 가만있어보자, 최초로 좋아했던 가수가 음, '소방차'군. 그중에서 나는 김태형 아저씨를 제일 좋아했는데. 미안합니다. 잘생겨서 좋아했어요. 다음으로 신승훈 오빠. '보이지 않는 사랑'이 타이틀 곡이었던 2집을 아버지가 선물로 주셨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지 못해. H.O.T.에서는 강타. 봐봐, 보컬 맞잖아. 그러고 나서 좋아한 가수는 아, 미안합니다, 유승준.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수능 공부도 소홀히 했어요. 제 휴대전화 번호 끝 네 자리가 사실 유승준 LA 집 주소 번지 수예요. 전 이렇게 영원히 유승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껄껄.
그분에 대한 충격 때문인가. 이후로는 여성 보컬을 사랑했다. 리아, 박혜경, 박기영, 롤러코스터, 체리필터, 러브홀릭. 그리고 긴 시간을 뛰어넘어 엔플라잉.
서연이와 나는 종종 덕질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투어스 콘서트를 간다길래 축하해 주고, 서연이는 엔플라잉의 신곡이 너무 좋다며 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열 살 소녀와 마흔이 넘은 교사의, 나이와 신분을 넘어선 우정.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에 다른 밴드가 들어오고 말았다. 서연이에게 '나, 다른 밴드도 좋아하게 됐어. 너무 잘하고, 너무 멋있어.'라고 했더니 서연이는 내게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선생님, 잡덕은 안 돼요."
미안해, 서연아. 선생님은 잡덕이 되어 '솔루션스(The solutions)'를 따라 전국을 떠돌고 있어. 라이브가 미쳤거든. 너도 알잖아, 최애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 나 지금 무지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