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임수 : 뒤로는 아파트를 등지고 앞으로는 물에 면하여 있다.
내가 방금 만든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H초가 그렇다.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고, 비록 뷰는 안 나오지만 길 건너에는 멋진 호수가 있다. 신도시라 아파트가 계속 들어서고 있어 H초도 2년 전 개교했는데, 내가 얼마 전까지 근무한 YB초 바로 옆이다.
어린이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라 잘 보이고 싶었다. 귀찮아서 화장대 구석에 밀어뒀던 톤업 패드를 얼굴에 올려놓고, 블루베리 요거트와 구운 달걀을 냠냠 먹었다. 보통 때보다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오랜만에 트위드 재킷도 꺼내 입었다. 나의 생명수가 되어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텀블러에 담고,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을 나섰다.
교실 거울에 비친 내가 낯설다. 불과 이틀 전 나는 밴드 콘서트에서 떼창을 하며 뛰어놀고 있었는데, 오늘은 너무 선생님이다. 현타가 온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 분열에 빠지려는 순간 '안녕하세요?' 낯선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 웃으며 이름이 뭐예요?, 반가워요, 준비물을 야무지게 잘 챙겨 왔네, 들어와요, 쉴 새 없이 말을 걸며 우리 반 등교 1호 어린이를 환영했다. 분열되려던 자아가 교사 자아로 대동단결했다.
교사가 안 됐으면 나는 가슴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말이 많다는 뜻이다. 할 말은 많은데 내향형 인간이라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거의 듣기만 한다. 그런데 어린이들 앞에서는 예외다. 이 말, 저 말도 모자라 쓸데없는 말도 자주 던진다. 그래도 오늘은 참아야 한다. 첫날부터 그럴 순 없지. 근엄해 보여야만 해. 무너지면 안 돼.
급식을 먹으러 가기 전, 한 어린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어요."
헉. 벌써요?
음.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무척 기쁜데요. 왜 마음에 드셨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심 좋잖아요. 뭐 예쁘다든가, 아니면 이쁘다든가.
그나저나 또 틀려버렸네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난 어색한 사이인데,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죠? 귀여운 여러분을 앞에 두고 어떻게 안 웃을 수 있는 건데요? 허 참.
쉬는 시간. 복도 통행을 지도하기 위해 교실 앞문에 서 있는데 바로 앞 남자 화장실에서 놀랍게도 성준(가명)이가 걸어 나왔다.
"어머, 성준아!"
내가 이름을 부르며 팔을 붙잡자, 시크한 성준이답게 슬쩍 눈만 맞추고 다른 데를 바라보고 선다.
성준이는 2년 전 YB초에서 가르친 제자다. 그때 사용하던 교실 앞문이 뻑뻑해서 가끔 여닫기 힘들 때가 있었는데 성준이는 그걸 쉽게 잘 고쳤다. 그래서 문이 말썽일 때마다 (문 고치기 기술을 보유한) 이성준 박사님을 외치며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럼 성준이는 오늘처럼 시크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와 몇 번 뚝딱 댔고, 고쳐진 문을 보며 우리가 환호를 보내면 별 거 아니라는 듯 무반응으로 자리에 돌아가곤 했다. 작년 3월, H초로 전학을 갔는데 올해 5학년이 된 성준이를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막연히 가졌던 기대가 바로 현실로 이루어진 거다.
지난주 나로 하여금 맥심 화이트골드를 외치고 복사기를 찾아 헤매게 만든 애매한 위치의 우리 교실이 마침 성준이가 사용하는 5학년 교실과 가깝기에 가능했던 일. 세상에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 오늘의 반가운 만남이 왠지 H초에서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예감 좋은 날.
https://youtu.be/6lxk_4CT4wM?si=m2f2tcJC8jYA4U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