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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 YOON Nov 08. 2021

1인가구를 통해보는 이상향의 사회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사월의 책, 2013) 서평

들어가며

책을 읽기 전 노명우 교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또 다른 저서인 <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 “모두가 부자 되기라는 상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몰상식이 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에 큰 감명을 받았었기에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가 어떤 책일지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교수님은 1인 가구였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거주 형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된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다만 그것이 자기 계발의 언어였다면 이렇게까지 설득력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혼자 사는 사람의 성공 방법, 마음 다스리기, 건강 관리 등의 내용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의 언어로 읽어낸 1인 가구는 달랐다. 1인 가구는 그저 통계상으로는 숫자 1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삶은 숫자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렇기에 그 다양한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1인 가구라는 같은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들어야 보아야 한다는 것이 노명우 교수님(이하 저자)의 생각이다. 


‘정상’과 ‘비정상’이 가구 형태에 스며들 때

1인 가구란 한 가구에 혼자 사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모두 다 같은 삶의 양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1인 가구라는 단어 아래에서 싱글, 독거노인, 자취, 미혼남녀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싱글이라는 단어를 두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수많은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데 사람들이 떠올린 모습이 과연 실제와 일치할까? 그렇지 않다. 실제와 동떨어진 모습을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책에서는 “오리엔탈리즘” 개념을 활용하여 설명했다. 동양인이 아닌 사람들이 “동양이란 이러할 것이다”라고 예측한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1인 가구가 “새로운 정상성”이라는 위치를 획득하지 못한 까닭이다. 1980년 우리나라의 1인 가구는 4.8%에 불과했다. 2012년에는 25.3%로 늘어났고 2035년에야 34%까지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았다.


아직 우리 사회가 인식하는 보편적인 가족 형태는 3~4인 형태의 핵가족인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는 유독 1인 가구가 반사회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사회-민족-국가-공동체의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비켜나 있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상태, 위험한 비정상성으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의 원인은 우리나라의 한국전쟁 전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으며 국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이에 믿을 수 있는 친족 단위로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가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이때 형성된 가족주의가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세 번의 독재 정부를 거치며 전체주의가 사회 전반에 퍼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시기에는 국가의 정책에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행동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노조 등의 단체들에 “빨갱이”, “다 해고해야 한다”와 같은 프레임이 씌워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전체주의에서 비롯된 기능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족주의적인 면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가족의 틀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반면 1인 가구가 보편적인 나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이고, 이들 국가에서 1인 가구 비율은 40%에 달한다. 이렇게 1인 가구가 보편적인 국가에서는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4인 테이블과 1인 테이블

4인 테이블과 1인 테이블의 차이는 무엇일까? 4인 테이블은 여러 사람이 서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다. 이 역할은 어디서 왔는가 하면, 바로 일반화된 타자로부터 부여된다. 미드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조직화된 놀이에 참여하면서 이런 일반화된 타자(generalized other)를 습득하게 된다. (현대사회학, 2014)


즉, 타인이 나에게서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지를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20세기 아버지의 일반화된 타자는 ‘엄하지만 늘 가족을 생각하는 생계부양자’가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역할 밀도로 채워진 곳을 4인 테이블이라고 명한다.


하지만 1인 테이블은 이런 역할의 구분이 없다. 모두 자신이 해야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차리는 것부터 모두 한 사람의 몫이다. 여기에 더해 1인 가구가 보편적이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는 참조할 만한 일반화된 타자의 모습이 없다. 그래서 1인 가구는 혼돈을 겪게 된다.


1인 가구의 타자

어떤 사람들은 1인 가구라는 단어 대신, 싱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싱글’이라는 단어에는 마법이 부여된다. 싱글이라는 단어 안에는 독거노인, 이주 노동자의 1인 가구 같은 이미지가 지워진다. 대신 매스미디어가 부여한 화려한 모습이 덧씌워진다. 넉넉한 수입, 혼자 살기에는 아주 넓은 대궐 같은 집, 그리고 남부러울 것 없는 취미까지.


이런 ‘싱글’의 모범적인 사례에 속하는 사람들은 넉넉한 수입을 바탕으로 소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일정한 상품을 통한 라이프 스타일을 채용함으로써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도 감명 깊었던 표현이 여기에서도 등장한다. 바로 자본주의의 훈장인 명품을 두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4인 가구가 보내는 ‘비정상’의 시선을 타파하고 되려 그들에게 넌지시 불쌍함의 시선을 내비친다.


우리 사회의 1인 가구들은 이 모습을 따라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모든 1인 가구들이 여기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자본이 넉넉하지 않은 1인 가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싱글’이 아닌, 그저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적금통장 몇 개를 껴안고 고독사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 말이다.


세대주가 신청해야만 하는 재난 소득

1인 가구는 경제적으로 당연히 위태로울 수 있다. 수많은 적금과 보험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당장 아프기라도 하면 같이 병원에 가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런 위험성을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4인 가구 위주로 짜여 있는 대한민국의 복지 제도는 1인 가구에 제대로 온정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다. 


복지제도 역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삶을 회복하는데 맞춰져 있다. 이런 복지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개인은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 안에서만, 가족 구성원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문화이자 정책이다. “부양의무자” 같은 단어들이 이를 나타낸다.


마치 미국의 구조기능주의가 호황처럼 번져 나가던 그때의 장면과도 같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오면 아내와 아이가 전원주택에서 마중을 나오는 그 장면, 그 장면이 아직도 구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세대주가 신청해야 하는 긴급재난지원금도 마찬가지이다. 5월 7일까지는 가구원 누구나 신청할 수가 없고 꼭 세대주가 공인인증서를 지참해서 신청해야 한다. 물론 1인 가구도 가구원이 곧 세대주이기 때문에 신청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1인 가구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별거, 가출, 가정폭력과 학대로 인해 따로 세대주와 따로 살고 있으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다행히도 2020년 5월 8일부터 세대주가 아닌 사람도 조건부로 신청할 수 있다. 만약 세대주가 해외 거주 중이거나 의사무능력자일 경우 가구원이 이의신청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던 가정폭력 등으로 피해자가 세대주와 다른 거주지에서 살 경우에도 이의신청을 통해 재난지원금을 수령할 수 있다. 이렇게 초기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행정부는 새로운 제도를 추가해서 사각지대를 줄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지적한 것과 같다. 복지의 틀이 가족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주축이 되지 못하고 세대주라는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 자연스레 빈틈이 생기고 아무리 제도를 추가로 보완해 보아도 더 많은 시간과 행정력이 소모된다. 앞선 이의신청을 통한 해결 방법도 한번 이의제기를 하게 되면 행정기관에서 판정이 내려올 때까지 지급이 중지된다.


이상적인 지향점 – 주거공동체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책이 거의 다 끝나가던 238쪽, “기본 소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가구가 중심이 되는 우리나라의 재난소득과 다르게 기본소득은 개인이 주체가 된다. “가족에 속해 있을지라도 개인의 자율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후에 나왔던 스웨덴의 주거공동체 역시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1인 가구를 구성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적지는 않다. 다만 주거 형태만 다를 뿐이지 여전히 ‘본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주말이 되거나 방학이 되면 짐을 빼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런 학업 때문에 발생하는 일시적 1인 가구는 전적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한다.


이제 갓 직장을 구한 사회 초년생들도 주거에서 고민을 이어간다. 살인적인 서울 집값, 콩나물시루가 되어버린 지하철, 끝이 안 보이는 광역버스 대기 줄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조그마한 집을 구해도 걱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집주인과의 갈등, 월세 지출로 인한 끝없는 수렁에 빠져버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거공동체의 형태가 절실하다. 주거공동체를 도입함으로써 경제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연대하여 합리적인 주거공간을 얻고, 공용 공간도 얻을 수 있다. 또한, 집에 문제가 생겨도 혼자서 집주인에게 대항하는 것보다는 훨씬 큰 위력이 생길 수 있다. 


슬프게도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쉐어하우스는 사실상 같이 주거하는 월세일 뿐, 진정한 의미의 주거공동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주거공동체가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현재의 주거 형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해관계를 뚫고 법을 개정해야 한다. 건물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이 그렇게 순순히 자신의 권력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더 많은 사회 재원을 투자해서 공공 주거 공동체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등록금이 비싸다고 모두가 국립대에 올 수는 없는 것처럼 이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다.


결론: 탈권위주의 사회

그래서 주거공동체를 도입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주거공동체 내에서 규칙을 정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저자의 경험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공간이다 보니 규칙이 필요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의한 부분을 규칙으로 만들고 지켰다. 다만 그 규칙은 기숙사의 규정과는 많이 달랐다. 강압적으로 사람을 통제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규칙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거공동체 규칙의 입법자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인 이상 규칙은 개인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외적 강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개인의 주거 형태가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탈권위주의 사회의 도래이다.


탈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가족이 가지고 있던 권위가 해체된다. 자녀의 행동을 제한하는 부모의 권위와 친족 중심의 권력이 해체된다는 뜻이다. 이런 가족의 권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일반화된 타자의 역할을 힘들게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다른 사람과 연대할 수 있다. 이 연대를 키워 나가는 것이 책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된다. 또한, 연대한 사람들은 그 구성원들이 직접 정한 규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언젠간 우리 사회도 1인 가구가 점점 많아지고, 주거공동체가 자리를 잡는다면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조금이나마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조금 소박하게, 누구나 자신의 재난소득을 신청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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