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다음 의료-중심 이동

14. 여섯 달에 한번 만나는 의사보다는 내가 더 잘 압니다.

by 최윤재

레이철 나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은 1960년대에 드물었던 여자 의과대학생이었습니다. 여학생도 드물고 여자의과대학교수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소아과 교수로 일했던 그녀는, 상담가로 중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시작하고 책을 썼습니다. 그녀의 책은 오랜 기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레멘이 환자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의사이자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5세부터 크론 병 (Crohn’s disease)이라는 만성병을 앓았습니다. 크론 병은 만성 염증성 장 질환으로, 소화 기관의 벽을 따라 발생하는 염증이 심한 복통과 설사, 영양 결핍과 생명을 위협하는 합병증을 초래합니다. 원인을 모르니 치료법이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아, 증상을 가라앉히는 데에만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증상은 악화와 완화를 반복하는데, 예고 없이 나빠지고 환자 개개인에 따라서도 그 양상이 다릅니다.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대부분 면역 억제제에 의존하는데 대표적인 면역 억제제인 스테로이드는 뼈를 약하게 합니다. 레멘은 전공의였던 시절, 회진을 위해 서 있던 중에 뼈가 부러져 쓰러졌습니다. 오랜 기간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여 약해진 대퇴골이 자신의 체중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병원에서 수석 레지던트 자리를 제의받고도 병 때문에 주저해야 했습니다. 의사도 이 병이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데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션 아렌스 (Sean Ahrens)는 의사가 아닙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12세부터 크론 병을 앓았습니다. 6개월에 한 번 의사를 방문하는 것으로는 제멋대로 제 갈 길을 가는 병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환자들 간의 정보 공유를 위해 크로놀로지닷컴(Crohnology.com)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여기에 참여하여 어떤 음식이나 자극이 증상을 악화시키는지, 새로운 치료법이 어떻게 증상을 조절하는지 보고했습니다. 이런 만성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 의사들은 대개 일기를 쓰라고 권합니다. 식사와 복용한 약과 증상을 기록하여 다음 외래 방문에 가져오도록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기록하기도 쉽지 않고, 환자마다 제각각인 기록을 데이터로 활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아렌스가 만든 앱은 스마트 폰에 실시간으로 기록한 정보가 증상의 악화-완화 (flare up-down) 그래프로 보이도록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각 지역의 환자들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염증성 장 질환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전문의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요. PatientsLikeMe나 Crohnology처럼환자들이 모여 만든 네트워크는 기존 의료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료 솔루션을 만드는 환자도 있습니다. 혈당 검사와 인슐린 주사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검사를 위해 바늘에 찔리고 치료를 위해 또 찔리고 정말 힘든 생활입니다. 이런 환자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인공 췌장(artificial pancreas)은 24시간 지속적으로 혈당을 측정하고 혈당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알고리듬에 의해 인슐린 펌프의 분비가 차단되는 구조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혈당 검사나 인슐린 투여를 위해 바늘에 찔리는 삶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기는 가격이 매우 비싸고 새로운 버전의 기기는 사용 허가가 나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2015년 1형 당뇨병 환자인 미국의 엔지니어 다나 루이스(Dana Lewis)는 현재 승인을 받아 시판 중인 기기를 자체 기술로 개조한 DIY(Do-It Yourself) 인공 췌장을 만들고, 개발자를 위한 데이터 공유 사이트인 기트허브(GitHub)에 시스템 코드를 모두 공개했습니다. 공식적인 의료기기 승인 절차의 한계와 비용 부담을 넘어 환자와 가족들이 주도하는 이러한 시도는 “우리는 기다리지 않겠다(#WeAreNotWaiting)”는 슬로건을 내겁니다.

심장내과의사 에릭 토폴(Eric Topol)은 이런 세태를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이제 환자 분이 진찰을 시작하실 겁니다(The patient will see you now).”


저한테 심방세동이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는 커서 의사가 되면 좋겠구나.”

중학생 시절, 제 노트를 들여다보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뭔가 칭찬인가 싶어 기대에 차서 여쭈었습니다.

“왜요, 선생님?”

“아무도 못 알아보게 글씨를 휘갈겨 쓰잖니.”


의사가 손으로 쓰는 차트나 처방전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단어를 읽을 수도 없게 갈겨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의 진단명조차 한 번 듣고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전신성홍반성낭창, 부신백질이영양증. 어떤 사람들은 왜 질병에 자기 이름을 붙여주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렇게 사람 이름이 붙은 병은 따로 길게 설명하지 않으면 어느 장기에 문제가 생겼는 지도 알 수 없습니다. 헌터 병, 헌팅턴 병, 윌슨병, 에디슨 병. 병명도 알기 힘든데 경과나 예후는 더 알기 힘들었지요. 다른 의사의 의견을 들으려면 우선 주치의한테 가서 진단서나 의뢰서를 부탁해야 하는데, 받아서 읽어봐야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로써 놓아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저한테 심방세동이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릭 토폴은 한 환자에게서 이런 제목의 이메일을 직접 받고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12). 심장은 네 개의 방이 모여 이루어지고, 전기적인 흐름이 각 방의 근육을 순차적으로 수축시켜 혈액이 정상적으로 순환되도록 합니다. 전기적인 흐름에 이상이 생기면 심장이 펌프 작용을 못하게 되어 전신에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합니다. 심방의 전기 흐름에 이상이 생기면 근육이 힘차게 수축하지 못하고 바르르 떨게 되는데 이를 심방세동이라고 합니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거나 맥이 빨리 뛰어 증상을 느끼는 환자도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검사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 환자는 증상을 느끼고 직접 심전도를 측정하니, 어플이 데이터를 분석하여 심방세동이라는 진단까지 붙여준 것입니다. 심장내과전문의도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이메일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겠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환자가 토폴 교수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맥이 빨리 뛰거나 가슴이 답답해서 이상을 느끼면, 병원을 예약하고, 증상을 설명하고, 의사가 심전도처방을 내면 검사를 받고, 결과를 본 의사가 심장 내과 전문의에게 의뢰를 해야 토폴 교수 손에 심전도 결과가 놓일 겁니다. 증상이 없다면 정기 검사에서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겠지요. 이 모든 과정을 넘어서 심전도를 찍고 진단을 내리고 의사를 검색해서 메일을 보내는 모든 과정이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된 겁니다.


112. Topol E.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 청년의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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