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다음 의료-중심 이동

15. 치료가 아니라 예방, 의사가 아니라 환자 중심인 의료

by 최윤재

내과 외래 환자실에 진찰을 받으러 가니까 스즈키라는 노의사가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댄 채 말했다.

“있어요, 공동(空洞)이 있습니다.”

나는 이 병원에서도, 전에 있었던 병원에서도, 또 요양소에서도 사진에 공동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열이 있고 어깨가 아프고 혈담이 나와 휴지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모자란다고 말했다. 스즈키 선생은,

“그럼 바로 단층 사진을 찍어 봅시다.”

하고 즉시 수배해 주셨다. 단층 사진 결과 6 센티쯤 안쪽에 공동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스즈키 선생의 청진기를 어떤 여의사는 신의 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선생 덕택으로 내 가슴에는 공동이 있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났다(113).


공동이란 결핵균이 폐 실질을 파괴시켜 공기로 채워진 부분을 말합니다. 공기로 채워진 부분과 폐실질 조직이 있는 부위의 숨소리는 원칙적으로 다르지만,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 공동을 청진기로 확인할 수 있다니, 요즘처럼 컴퓨터단층촬영(Computed Tomography, CT)을 휴대전화 사진 찍듯이 찍어대는 시대에 가능할까요. 위 글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1922년에 태어났습니다. 24세에 폐결핵으로 진단받고 십여 년간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항결핵제가 겨우 도입되고 이제는 퇴출된 외과적 치료와 절대안정만이 치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에 폐병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진단 기술이고 치료제고 기가 찰 정도로 부족하던 시절에, 스즈키 의사의 청진은 거의 예술의 경지입니다.


신체 진찰은 기술입니다. 예술의 경지까지 오르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몸에 익히기만 하는 데도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쏟아지는 지식에 파묻힐 지경인 요즘, 검사로 대치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는 데 쓸 시간은 점점 부족해집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의사 아브라함 베르게 제(Abraham Verghese)는 CT 촬영에서 노출되는 방사선으로 인한 발암 위험성의 증가보다 더 위험한 것이, 쉽게 CT를 처방하면서 의사들이 신체검사 기술을 잃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114). 그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의사들 이엑스레이가 아닌 타진이나 청진으로 흉수를 진단하는 것을 보면 겸허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 자신도 CT나 MRI가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에티오피아와 인도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115). 의학 드라마 닥터 하우스(House M.D.)의 모태가 된 칼럼을 쓴 예일대학교의 리사 샌더스(Lisa Sanders)도 신체검사가 진단 과정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을 크게 우려합니다. 매년 정기적으로 유방조영술을 실시하는 1100명의 여성 가운데 절반 가량만 담당 의사가 손으로 유방 검사를 실시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유방 조영술의 검사 빈도는 지난 20년간 매년 증가했지만 의사의 유방 검진은 점점 그 빈도가 감소하고 있습니다(116). 이런 추세가 역행될 수 있을까요. 외과 의사도 촉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결국 안쪽을 들여다보려면 초음 파나 단층촬영검사가 필요합니다. 어차피 촉진만으로 진단할 수는 없으니, 조영술 빈도가 증가하는 동안 의사의 유방 검진은 오히려 감소하는 것입니다.


시진, 청진, 타진, 촉진. 힘들게 손에 익혀야 하는 진찰 기술이었습니다. 이미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기계가 시진과 청진을 대치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 앱이 심전도를 그리며 동시에 심박동을 스피커로 재생하는 데, 청진기로 주의를 기울여 심잡음을 들으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진화해 온 인간의 촉각은 아직 대신하기 어렵습니다. 로봇에게는 간단한 블록 쌓기도 힘겨운 과제입니다. 다시 말해 유일하게 촉진만이 기계로 대체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촉진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고, 결국 몸 안을 들여다보려면 초음파나 단층촬영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지칠 줄 모르는 과학 기술자들은 전자 피부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플라스틱고분자 돌기를 장착한 투명 필름은 물체에 닿으면 탄소나노튜브들이 맞닿아 전류가 흐르고 전기신호를 분석하면 촉각을 대리할 수 있습니다.


원로 교수님 한 분은 진료실에서 모든 환자의 옷을 벗기고 관찰하며 진찰을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지금도 신생아라면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이런 시도만으로도 온갖 험한 비난을 받으며 여러 매체에 오르내리게 될 가능성에 농후합니다. 성인도 아닌 성 조숙증 어린이 가슴을 진찰하다가 보호자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은 의사도 있습니다. 의사도 환자도 신체진찰을 점점 불편해합니다. 의료 지식이 대중화되면서 법적인 분쟁도 증가합니다. 숙련된 의사의 진찰은 진단의 범위를 축소시켜 불필요한 검사와 의료비 낭비를 줄일 수 있지만, 진찰 영역이 더 확대되기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실수로 환자 셋을 잃어야 진짜 의사가 됩니다.

응급의학과 의사 마티 콘(Marty Kohn)은, 의사가 사람이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류가 오진으로 이어지고,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이 중 하나가 한 가지 정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고정 오류(anchoring bias)입니다. 두세 가지 증상을 듣고요기에 맞는 진단을 붙이면, 다른 진단을 시사하는 정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혹은 한 가지 맞는 진단을 찾으면, 공존하는 다른 질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한 가지만 치료하는 것이지요(117). 오컴의 면도날, 사고 절약의 원리에 따라 미로 같은 환자의 증상에서 한 가지 정답을 찾으면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환자가 나이가 많아질수록 여러 가지 병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치매. 한 가지 진단이 붙여지면, 다른 증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결과 환자를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의사도 오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환자 셋을 자기 실수로 잃어봐야 겨우 제대로 된 의사가 된다는 말을 들은 의대생들은 기가 질립니다. 모든 의사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공동묘지가 있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의사들끼리 서로 덮어준다고 힐난하지만, 언제든지 비슷한 실수를 할 수 있고, 이미 저질렀을 수도 있는 의사가 동료를 함부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왓슨트레이닝의 임상 책임자인 콘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메워줄 수 있는 것이 왓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심장내과 전문의들은 유전학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른다.

휴 라인호프(Hugh Y Reinhoff Jr.)는 의사이자 기업가입니다. 딸 베아트리스에게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전적 심장 혈관기형의 원인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고 인터넷 커뮤니티 마이도터즈디앤에이 (MyDaughtersDNA.org)까지 만들었습니다. 기존의료에 대한 강한 배신감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전학은 결코 의사들에 의하여 임상 적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소비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그것이 소프트 웨어든 다른 무엇이든 먼저 소비자들에 의하여 수용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알맞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현재 의사들의 수준도 바로 이 정도일 뿐이다. 심장내과 전문의들은 유전학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른다(118).


이 말을 인용한 사람이 심장내과 전문의이자 유전학자인 에릭 토폴입니다. 저 정도로 과격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덤덤하게라인 호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토폴은 소비자가 자신의 게놈 검사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 의사를 찾을 때, 의사들은 ‘SNP가 뭡니까?’라고 물을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한 바 있습니다(119). 이 예상은 이미 10년도 훨씬 전 글이고, 현재 수련 중인 젊은 의사들은 의과대학시절부터 유전학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글이 발표될 무렵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토폴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미국의 심장내과전문의는 엄청난 수가를 받으며 일을 하고, 당연히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경쟁하는 그룹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못 따라가거나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료가 발달할수록 한 개인이 익혀야 하는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의 80%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코슬라도 조금 안 되어 보였는지 위로합니다. 잘못이 다 의사들 탓은 아니다, 의사들이 20년 전에 의과대학에서 배운 것부터, 주머니 속 PDR(Physicians Desk Reference)에 쓰인 것, 쏟아지는 최신 지견을 모조리 외우 기를 어떻게 기대하겠는가,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안 된다, 그냥 인터넷에서 찾는 게 낫다고 말입니다. 이제는 굳이 검색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학습한 AI가 바로 답을 내놓습니다.


알아야 하는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폭발하는 데이터입니다. 20세기까지 데이터는 어렵게 획득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연구자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하여 어렵게 실험 데이터를 획득했습니다. 임상의는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의료는 이렇게 모은 데이터에 근거하여 한 질환의 치료법을 개발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데이터는 매 순간 저 혼자 생성됩니다. 수많은 센서와 카메라가 순간순간의 기록을 쏟아놓습니다. 차세대염기서열분석기술(Next Generation Sequencing, NGS)은 유전체 검사의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추어 유전체와 전사체의 데이터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데이터 획득이 아니라 쏟아지는 방대한 데이터의 분석과 연결이 문제 해결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개인맞춤의학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람인 의사는 오진을 피할 수 없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지식을 모두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웨어러블 기기와 진단 기계의 분석능력은 날로 발전하여 실시간으로 환자 정보를 생성하는데, 진찰 기술은 오히려 퇴화하니 검사만 늘어납니다. 환자들은 모여서 네트워크를 만들어 진료 기록을 공유하고 스스로 치료법을 찾아 나섭니다. 이제까지 의료계 관행은 문제가 생긴 다음에 환자가 병원을 찾아야 진료가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데이터 축적으로 선제적인 진단이 가능하게 되면, 치료할 병변 자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치료가 아니라 예방으로,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중심인 의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113. 미우라 아야코. 길은 여기에: 범우사; 1998.

114. Verghese A. Treat the patient, not the CT scan. the New York Times. Feb 26,2011.

115. Verghese A. Physician revives a dying art: the physical the New York Times. Oct 11, 2010.

116. Sanders L. 위대한, 그러나 위험한 진단: 랜덤하우스; 2010.

117. Cohn J. The robot will see you now. The Atlantic. 2013.

118. Topol E. 청진기가 사라진다: 청년의사; 2012.

119. Topol E. What you can learn from a gene scan. Wall Street Journal. Dec 2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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